달리기 에세이

18장. 봄을 따라 걸었다.

by 오구TREE

연휴를 앞두고 어김없이 엄마의 제안이 찾아온다.

“산에 갈래?”

나는 늘 되묻는다.

“얼마나 걸려?”


산행의 길이와 난이도는 내가 참여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5월 초, 긴 연휴를 앞두고도 엄마는 어김없이 산을 제안했다. 연화도에서 함께 산을 오르던 날, “할 만하지?” 하고 물은 엄마의 질문에 내가 “응.” 하고 대답했던 게 이번 산행의 기폭제가 되었다. 엄마는 그때의 기억을 근거 삼아, 이번에도 비슷한 난이도라며 나를 슬쩍 꼬셨(?)다.

나는 매번 속으면서도 또 매번 수락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니까.


이번에 우리가 향한 곳은 외가에서 멀지 않은 마구산이었다. 해발 고도만 보고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산행을 시작해 첫 이정표를 마주한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정상까지 7.5킬로미터’라는 숫자는 결코 짧지 않았다. 이미 어느정도 걸은 뒤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마구산의 산길은 능선을 따라 나 있었다. 트레일러닝 훈련에 적합할 정도로 길이 부드럽고 완만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어쩌면 운동 중독에 가까운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중독이 아니라 강박일지도. ‘운동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 어쩌면 나는 지금 그 어딘가에 서 있는 중일지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긴 산행이 시작되었다.


이날 산행 멤버는 엄마와 셋째 이모, 동생 그리고 나. 이모를 제외한 세 명은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에 걱정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초반 페이스는 오히려 이모가 가장 빨랐다. ‘역시 몸이 가벼워서 그런가.’ 나를 제외한 셋의 날씬한 몸매가 순간 부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자신의 체력을 뽐내는 법이 없다. 늘 나의 속도에 맞춰 걸어준다. 내 숨소리가 들릴 만큼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무리하지 않도록 배려해준다. 둘이서 산에 오를 때면 항상 내가 앞서고, 엄마는 뒤에서 조용히 받쳐주는 구조다. 내 걸음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선두에 선 엄마는 이모와 나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길을 안내했다. 연화도 산행 때와 마찬가지로, 동생 또한 나를 배려해주는 게 느껴졌다. 분명 체력은 나보다 좋을 텐데도, 내 뒤에서 걸어와 주었다. 후미 대장을 자처한 셈이다. 여섯 살 차이 덕에 늘 어리게만 보이던 동생이 이날은 처음으로 듬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능선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쉼터가 나와도 머물지 않고 대신 체력을 안배해 꾸준히 걸었다. 스퍼트를 내고 쉬기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걷는 것이 더 잘 맞았다. 실제로 그런 방식이 운동 능력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몇 번의 오르막을 지나고 나서야, 잠시 멈춰 사진을 찍고 숨을 돌렸다. 하지만 정상까지는 아직 3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평지에서는 괜찮다가도 오르막이 나오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원래도 조금만 운동해도 숨이 가빠지는 체질인데, 심박수가 낮아서 그런 듯하다. 평소 맥박이 50 내외인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심박이 치솟는다. 그래서 내 숨소리는 산 전체에 울릴 만큼 크다.


몇 번이나 심박을 끌어올린 끝에, 드디어 마지막 고바위가 나타났다. 이 고개만 넘으면 정상이다. 어느 산이든 정상 부근은 가장 가파르다. 산은 쉽게 정상을 내어주지 않는다. 숨은 거칠고 다리는 묵직했지만, 정상에 도달하자 해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하산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정상석을 가운데 두고 찍는 인증샷의 순간은, 언제나 참 기쁘다. 아무리 힘들고 땀이 흐르고 얼굴이 벌개도, 그 순간만큼은 환하게 웃게 된다. 그 웃음은 단지 사진을 위한 연출이 아니다. 진심이다.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감정이다.


하산길은 예상보다 괜찮았다. 그간 꾸준히 하체 운동을 해온 덕분인지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발목이 삐끗하지도 않았다. 오르는 길에서 나를 앞질러가던 이모는 어느새 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초반에 체력을 많이 써버린 탓이었다.


산행에서 또 다른 즐거움은 자연의 색이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야생 철쭉이 눈에 들어왔다. 연분홍 빛의 이 꽃은 실제로 봐야 그 생생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처음으로 오동나무 꽃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본 것이지만, 보랏빛을 띤 그 꽃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마구산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았다. 산길 곳곳에는 송홧가루가 노란 뭉텅이로 떨어져 있었다. 봄은, 역시 색의 향연이다. 엄마와 나는 총천연색으로 피어난 이 봄을 참 좋아한다.


산행을 마친 뒤 확인해보니, 우리가 완주한 코스는 총 15.7킬로미터였다. 평소 운동하는 시간과 양을 훌쩍 넘겼지만, 마구산 특유의 부드러운 능선과 엄마의 맞춤 속도가 있었기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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