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킹이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사실 나는 빵집에 가도 빵보다는 샌드위치만 사고, 달달한 디저트는 일행이 먹고 싶을 때나 먹는 편이었다. 집에서 빵을 굽고 케이크를 만드는 건 미국 가족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이지, 우리 자취방에서 연출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단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자체가 필요했다. 일상은 무료했고, 회사에서 흥미로운 일은 누구랑 누구가 비밀 연애 중이라는 소문뿐이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자극을 찾고 있던 차에, 베이킹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시도한 건 케이크 만들기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보자가 시도하기엔 무리였지만, 그땐 몰랐다. 유튜브에서 본 도시락 케이크 레시피는 단순해 보였고 2시간이면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에 만나 점심, 저녁을 함께 먹고도 저녁 늦게까지 계속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계량, 반죽, 크림 만들기까지 모든 과정이 시간이 드는 노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일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가루였던 박력분이 달걀을 만나서 좋은 냄새를 풍기는 갓 구운 빵이 되었다. 치즈 뭉텅이는 예쁜 파스텔 색 케이크 크림으로 변했다. 내 손 끝에서 나의 노력이 바로 결과로 나타나는 걸 보니 별로 힘든 것 같지도 않았다. 오븐 문을 열지 않아도 빵이 익으면서 나는 고소한 냄새는 다음 베이킹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한 베이킹이었지만, 금세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회사 메신저로 다음번 베이킹 계획을 잡을 땐 소개팅 애프터를 잡는 것처럼 설레었고, 우린 몇 판씩 빵을 구워내느라 자정이 지나서야 헤어지곤 했다. 이렇게 베이킹이 재미있어질 줄은 몰랐다.
베이킹을 하면서, 전혀 모르는 영역에 도전하는 즐거움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초심자가 되니까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걸 배워서 시험이나 자격증으로 나를 증명하고, 커리어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일상에서는 전혀 쓰지 않을 용어와 도구를 쓰면서, 내 세계가 확장되어가다 보니 다른 일상에서도 덩달아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작은 성취감들은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주어서 다른 영역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황
우리는 이제 전부 결혼했고 더 이상 동네 주민이 아니다. 모여서 베이킹하자고 항상 말하지만 이게 쉽지가 않다. 그래도 각자 집에 오븐이 있고 사둔 도구가 있어서 각자 남편과 종종 뭔가를 굽곤 한다.
나는 주로 집에 소비기한이 얼마 안 남은 식용유가 있을 때 빵을 굽는다. 예전에 대왕 카스텔라가 재료로 기름을 넣는다고 이슈였는데, 사실 베이킹할 때 버터 대신 식용유를 넣는다. 그것도 엄청. 그래서 식용유를 빨리 해치우고 싶을 때 재료를 몽땅 넣고 구워버리면 되는 간단한 빵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