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세권이면 뭐하나 -
벌써 홀로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다 됐다. 그간 나는 운 좋게도 딱 두 번만 이사를 했다. 또 따따블로 운이 좋았는지, 집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기도 했다.
첫 독립공간이었던 고시텔 앞엔 재래시장, 또 건너편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었다. 두 번째로 얻은 자취방 앞엔 자그마한 해성마트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 온 자취방 앞엔 편의점이 있다. 그것도 도보 10초, 뛰면 5초 거리에 말이다.
나 또한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땐 로망 같은 게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면 이것저것 장 봐서 가야지. 냉장고엔 지난 번에 쓰고 남은 호박이랑 감자가 좀 남았으니까… 오늘은 남은 재료 처리 겸 된장찌개를 해먹어야겠다! 달걀프라이도 하나 하고, 나물거리도 좀 사가야지!’
여느 누구나 그렇듯 매일매일 나만을 위해 차리는 식탁, 차츰 쌓여가는 요리 실력 같은 걸 기대한 거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다.
첫째, 일단 기본적으로 나는 요리실력이 중하위 수준이었다. 그런 주제에 또 간을 쎄게 먹는 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끓여준 라면을 먹던 남자친구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붓다시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둘째, 편식쟁이다. 제대로 된 된장찌개를 끓여 먹으면 양파랑 애호박은 쏙쏙 골라내고 먹고도 남았다. 카레를 하면 당근은 거들떠도 안 볼 것이다.
셋째, 여러 식재료를 사기에 막내작가 월급은 턱 없이 부족했다.
넷째, 고시텔은 나름 개인 냉장고를 구비해주긴 했으나, 크기는 코딱지만했다. 냉동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뭘 해먹기엔 너무나 바빴다. 요리를 해먹을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나았다.
그러다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밖에서 뭘 사먹고 오거나 컵라면을 사와서 먹는 일이 늘었다. 당연히 편의점 가는 횟수도 늘었다. 비록 꼴랑 컵라면, 꼴랑 소세지지만. 가끔 돈이 많이 남았을 땐 비싼 아이스크림 칸에 함께 있는 볶음밥이나 만두를 사먹곤 했다. 덕분에 편의점 포인트는 내 월급과 다르게 착착 쌓였다. 계산대 모니터에 포인트가 비축될 때마다 왠지 뿌듯했다.
내가 편의점을 제 집 드나들듯 하자 달라진 게 꽤 있었는데, 하나는 체중이었고, 또 다른 것은 편의점 사장님이었다.
사진 속 지점은, 본문 속 편의점과 연관이 없음을 밝힙니다.
A지점을 낮에도 새벽에도 수십 번 드나들자, 편의점 사장님은 홀로 내적친분을 쌓았는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셨다. 처음 질문은 이거였다.
“아휴, 매일 같이 야식이네. 왜 이렇게 밤에 많이 먹어요?”
순간 밤샘보다 더한 피로가 느껴졌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 야근이 잦아서요.”
이 짧은 답변 속엔 생략된 것들이 많았다.
“아, (저는 방송작가가 직업인데요. 일이 많다보니) 야근이 잦아서요. (정신이 없어서 끼니도 못 챙겨먹었고, 지금이라도 안 먹으면 죽겠더라고요. 건강은 걱정 마세요. 아직 건강하답니다!)”
이대로 전부 답하면 편의점 사장님과 여기서 한 시간짜리 토크쇼를 찍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줄여서 말했다. 물론 야근이 많다라는 답변만으로도 또다른 이야깃거리가 이어져갈 수 있었지만, 내 딴엔 이게 최선이었다. 밤샘을 한 내 몰골이 너무 초췌했는지 편의점 사장님은 잘 챙겨먹어야한다는 응원을 해주시며 대화를 끝마치셨다.
그리고 다음 번에 갔을 땐 전혀 생각지도 못한 패턴으로 말을 걸어오셨는데,
“아가씨, 이거 샌드위치 폐기 남았는데, 먹을래요?”
-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사장님 손에 들린 건 내가 돈 주고 사먹지는 않을 생크림이랑 과일이 든 샌드위치였다.
“아, 밥을 배부르게 먹어서.. 괜찮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곤 나는 원래 살 계획도 없었던 껌이나 한 통 사서 나와야 했다. 만두는 두 블럭 건너서 있는 편의점까지 가서 샀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날 이후부터 이 방식을 고수하셨다. 내가 갈 때마다 폐기 직전인 것들이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신 것이다. 종류도 다양했다. 생선구이 도시락, 주스, 김밥, 햄버거 같은 것들. 그때마다 나는 하고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사장님, 어째.. 제가 안 좋아하는 것들로만 챙겨주시는 거죠...
나는 음식에 대한 호불호도 심하고 편식도 심했던 지라 편의점 음식도 안 먹는 게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걸 얼굴 몇 번 본 게 다인 사장님이 어찌 알겠는가. 안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나는 소심했고, 집앞 10초 거리의 편의점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죄송한 표정을 하고 “괜찮아요” 라며 손사례를 쳤다. 그때마다 사장님은 실망한 얼굴을 했다. 기껏 생각해서 폐기를 챙겨놨는데 한 번도 안 가져가냐는 말도 덧붙였다. 참으로 상대방은 배려해주지 않는 친절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좀 더 걷더라도 앞으론 두 블럭 건너 편의점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 이후, 나는 집앞 도보 10초, 뛰면 5초인 편의점 방문 횟수를 줄였다. 가끔 퇴근할 때 다른 마트에 들러서 물건을 사오기도 하고, 두 블럭 건너 편의점으로도 몇 번 갔다. 다행히도 그 편의점 알바생은 내가 무얼 사먹는지, 밤샘을 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참 다행이었다.
A지점의 편의점 사장님은 매번 내가 사가는 물건(주로 간단하게 끼니를 채울 수 있는 것들)과 초췌한 몰골을 보고, 안쓰럽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은연 중에 저 아가씨도 어느 정도 나랑 얼굴을 텃겠지 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편의점 사장님이 생각하는 친분의 선까지 가지 못했다. 그리고 편의점 사장님 또한 내 선을 침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당당하게 말할 용기는 없다. 그냥 이렇게 생각해야지.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편식이 심하고, 낯을 가려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를 하기 싫어할 뿐이지. 다 내 잘못이다’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