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Nov 18. 2019

아빠의 노동과 나의 노동

: 묵묵히 감정 노동을 버티는 건, 왜 인정해주지 않나요?

내가 첫 회사를 관두던 날, 아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얘가 왜 그렇게 끈기가 없니? 얼마 다니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를 그만두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


'평생 직장의 시대'를 살아온 아빠에게는 내 모습이 너무 책임감 없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빠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저 말을 들었을 당시 나는 아빠의 말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난 1년 반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모르면서 너무나 쉽게 나를 비난하는 아빠가 난 솔직히 조금 미웠다.


사실 아빠는 나와 같이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아빠는 시골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졸업하자마자 알루미늄 호일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에 적성에 맞지 않아 10개월 만에 퇴사했고,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포크레인을 몰았다. 그러나 중장비 기사로 첫 출근을 하던 날, 논두렁에 포크레인을 빠뜨렸고 그 후론 중장비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아빠는 서울로 상경해 명동에 있는 의상실에서 일을 배웠고, 훗날 미싱사가 되었다.



아빠는 옷에 단추구멍을 뚫고 단추를 다는 작은 미싱 공장을 운영했다. 사실 공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규모의 사업체였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공장을 운영했는데, 늘 2~3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빠의 직원은 때로는 한국인이기도 했고, 때로는 외국인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는 미싱사로 일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중국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미싱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직장인이었을 때가 없었다. 아빠는 늘 사장님이었고, 육체노동의 대가로 돈을 버는 노동자였다.


화이트 컬러 노동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아빠의 직업을 꽤 자랑스러워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를 '단춧구멍 집 딸내미'라고 놀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빠 공장에 커다랗게 쓰인 '단추구멍'이라는 간판을 보고 철부지 남학생들이 나를 놀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빠의 직업이 부끄럽지 않았다. 나를 놀리는 아이들의 아빠는 기껏해야 직장인이었고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었으니까... 또 그들은 월급을 받아 전세나 월세를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빠는 월급을 주면서 서울에 두 다리 뻗고 잘 자기 소유에 집이 있는 슈퍼맨이었으니까...


남들이 보기엔 밑바닥을 전전하는 직업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 아빠는 누가 뭐래도 위대한 노동자였다. 아빠는 늘 땀 흘린 만큼 돈을 벌었고, 자신이 행하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직업적 사명을 가지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틈틈이 견습생을 키워 사회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렇다. 아빠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였다.



나는 2013년 인턴사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제 어느덧 일을 시작한 지 7년 차가 되었다. 물론 7년을 내리 일한 건 아니다. 그 사이 나는 광고·홍보 에이전시 생활이 힘들어 여러 번 회사를 때려치웠고, 한동안은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게 출퇴근하기도 했다. 어찌 됐던 7년 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가 땀 흘린 만큼 벌고, 땀 흘린 만큼 능력을 인정받길 바랐다. 하지만 회사라는 게 늘 내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흐린 기억 속 아빠는 비교적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으며 일을 했다. 거래처에서 얼마만큼의 물량을 받아오면, 아빠는 납품기한에 맞춰 옷에 단춧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다. 물론, 아빠에게도 야근은 있었다. 아빠는 SS/FW 신상품이 나올 때면 밤늦게까지 일해 납품기일을 맞췄다. 특별히 신상품 출시 시즌이라고 거래처에서 비용을 더 주는 건 아니었지만, 아빠는 짧은 납품기간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그랬다. 아빠의 일은 내게 주어진 시간에,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내 일을 달랐다. 내 일이 내게 주어진 일만 야무지게 처리하면 되는 거였더라면, 나는 이토록 많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 거다. 그 어떤 직종보다 '갑과 을'이 확실한 직종에서 일하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저 나 혼자 가만히 앉아 하루하루 나에게 할당된 양의 일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지금 어릴 적 내가 보던 아빠의 모습처럼 라디오를 틀어놓고 내가 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노동의 대가는 보통 퍼포먼스에 기반해 평가된다. 단위 시간당 얼마만큼의 퍼포먼스를 냈는지를 보고 결과론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일은 퍼포먼스에 기반해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잘하는 일을 하면서도 쓸데없는 감정 노동에 내 노동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다. 이를 테면, 광고주도 모르는 광고주의 속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 무엇이 정답인지 알면서도 오답을 주구장창 외치는 광고주를 설득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 그리고 광고주가 한 실수도 마치 내가 한 실수인양 뒤 짚어 쓰는 시간. 이런 시간 때문에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소홀히 하게 될 때가 많다.


감정 노동의 시간은 나의 업무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감정 노동만큼 힘든 게 어디 있다고. 왜 회사는 감정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감정 노동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회사는 감정 노동에 지는 사람을 패배자로 인식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감정 노동 또한 노동의 한 부분이요, 우리 사회가 크게 인정해줘야 할 숭고한 일이다.


지난달, 나는 감정 노동에 크게 패했다. 두 달을 내리 야근해도 쓰러지지 않던 나인데, 불합리하고 부당한 감정 노동에 나는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감정 노동은 자부심을 가지고 하던 내 일을, 자긍심을 가지고 살던 내 삶을 한순간에 무너트렸다.


회사는, 그리고 나의 부모님 세대는 "요즘 애들이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둔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삶을 망가트리면서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가?". 나의 감정 노동은 대가를 인정받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부모님 세대에게도 물론 감정 노동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 노동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가 다른 것은 '문제의식'이다. 우리 세대는 불합리한 감정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노동력과 전문성을 제공하면서 왜 우리는 불합리한, 부당한 감정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노동과 감정 노동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 감정 노동의 대가도 충분히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일 또 불합리한, 그리고 부당한 감정 노동 속으로 내 작은 몸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묵묵히 견뎌낼 것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이 감정 노동을 버틸 생각이 없다. 7년의 내공으로 어느 정도의 말과 행동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도가 넘친 행동과 말은 나 역시 어쩔 재간이 없다. "너무 자주 이직하면, 앞으로 취업이 더 힘들어져"라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감정 노동이 나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헤치는 날이 오면 또다시 퇴사를 선택할 것이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지만, 그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도 이렇게 말했지 않나.

"I love you, but I love me more."


나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고, 나보다 더 가치 있는 노동은 없다.

작가의 이전글 Twenty-twent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