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의 주체성 vs 사회적 강요에 의한 코르셋
지난 며칠간 내 이름의 연관 검색어에는 "꾸밈 노동"이라는 말이 따라왔다.
나는 꽤 오랫동안 SNS에 셀카를 올려왔는데, 그때마다 순수한 감탄을 제외하고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으래 그렇듯 칭찬을 가장해 나를 '품평'하는 의견, 두 번째는 나의 화장이나 옷차림을 비롯한 꾸밈은 '노동'이기에 페미니즘에 악영향을 준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만화에 그리는,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기에 소재 감사합니다 하고 말 내용이었지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사실상 저격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자 후자의 사람들은 같은 논리로 나를 비난했다. 어느새 나는 꾸밈 노동을 타당하다고 여기며, 여성 혐오 사회(남성에게는 꾸밈을 강요하지 않으나 여성에게는 꾸밈을 강요하는)를 정당화하는 여성으로 프레이밍 되었다.
(여기서 우스운 점은, 나는 일반적인 회사나 알바를 간다면 당장에 지우고 오라는 소리를 들었을만한 블링 블링 한 화장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투블럭에 스모키 메이크업, 수트를 입은 사진을 올리며 똑같은 소리를 했으면 덜 조롱받았을까? 참고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꾸밈 노동을 노동이라 인정하라, 그래 거기까지는 알겠다. 어쨌든 손을 움직이고 공을 들이는 '작업'이니까. 하지만 꾸밈 노동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꾸밈 노동에 의해 고통받는 다른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것 까지는 음,
갔다. 너무 갔다.
내가 말한 "꾸밈 노동"에 대해 정당화를 하거나 반박을 하고자 한다면 돌고 돌아 사회에 따져야 하고 가부장제에 따져야 한다는데, 맞아. 그게 맞다. 나는 현대 여성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강요한 적도 없고, 그런 사회를 만든 기득권자도 아니며, 나 역시 그 차별을 받아온 한 명의 여성이다.
돌림노래 같아서 지겨운가? 나도 지겹다. 근데 트위터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이곳이 지옥도다. 여혐민국이다. 그들의 말대로 회사나 알바처에서는 여성의 꾸밈을 강요한다. (이걸로 만화도 그렸다) 근데 그걸 만든 건 내가 아니다. CGV 여성 미소지기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라고 한 건 내가 아니다. 회사 오는데 화장 좀 하고 오라는 상사나 여자 얼굴이 그게 뭐냐고 좀 찍어 바르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 그 사회를 만든 건, 내가 아니다. 코르셋 만들고 입힌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그쪽이 아닌 코르셋을 입고 있는, 혹은 입고 있는 것 같은 쪽을 비난하는 걸까. '개념녀'를 깎아내리고 어떤 이들의 착장을 SOUP룩이라 폄하하는 것도 같다고 본다. 그들을 만든 건 체제이고 사회이다. 그 체제와 사회를 누가 만든 것인지는, 페미니스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개인의 코르셋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도 폭력이다. 히잡을 여성 혐오라 단정하고 벗기려는 제1세계의 백인 여성들과 같은 맥락이다. (참고링크) 각자에게는 각자의 무기가 있고 갑옷이 있다. 각자의 방법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꾸밈의 사회적 배경 때문에 여성 개인의 선택은 결코 주체적일 수 없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럼 여성의 주체성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거야말로 페미니즘에 반하는 내용 아닌가?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꾸미고 싶으면 꾸미고, 안 꾸미고 싶으면 안 꾸미고. 그게 페미니즘 아닌가. 만약 그 자격을 남이 부여하려 든다면 설령 같은 페미니스트끼리라도 그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과 다를 바 없다.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안 꾸미고 싶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브레이지어를 하지 않고,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고 싶다고. 동시에 외모지상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거 해 남자들이 현대에 들어와 화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면 여러모로 가산점을 받듯이, 여성도 꾸민 상태가 기본이 아니라 가산점을 받아야 공평하다는 것 역시 동의한다. 그러니 꾸밈을 안 했을 때 불이익을 주는 이 사회가 이상한 것이라고, 그것을 지적하고 고쳐야 한다고 나는 이미 몇 번이고 말했다. 심지어 당장 지금 그것을 주제로 만화도 그린다. 그런데도, 왜 항상 화살은 다른 피해자인 여성에게 돌아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대체 왜, 체제가 아닌 개인을 공격하는가? 그게 더 쉬워서? 그게 더 후폭풍이 적으니까?
자격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약자만이 발언할 수 있다는 자격 논리에 따르면 페미니즘을 추구하려면 유색인종 여성이자 레즈비언이고, 장애인이고, 나이가 많아야 하며, 비 매력적인 외모에 꾸미지 않는 저학력자에 저소득자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젊고, 잘 꾸미고, 헤테로 여성이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반응을 실제로 자주 들었다. 그럼 나는 그걸 위해서 성적 지향을 "바꿔야" 하나? 일부러 마약을 해서 자신의 외모를 망가뜨렸다는 어느 페미니스트 운동가처럼, 나도 내 외모를 망가뜨려야 하는가? 그래야만 나는 페미니즘 만화를 그릴 자격을 얻나?
아니, 나는 싫다.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싶다.
나는, 적어도 나는 내가 예쁜 게 너무 좋다. 화려한 금발머리에 금색 펄 아이쉐도우에, 관자놀이까지 아이라인 그리고 쥐 잡아 잡순 빨간 립스틱 바르고 저런 옷은 대체 누가 입냐는 그런 옷 입고 온 사방을 누비고 싶다. 샤넬 컬렉션 제일 앞 줄에서 보고 싶고 보그에 단독 화보도 나가고 싶다. 공부도 많이 하고 책도 내고, 방송도 나가고 광고도 찍어서 돈도 많이 벌 거다. 모 남자 작가들은 잘만 찍던데, 나라고 못 찍을 거 뭐냐고. 'Girls do not need a prince'티셔츠 입은 사진을 SNS에 찍어 올렸다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대놓고 페미니스트 선언한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거 정말 보여주고 싶다. 그걸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활용하는 건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내린 "썅년"의 정의가 썅년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는 글도 봤다. 만화에 나온 여자들은 모두 예쁘고, 마르고, 잘 꾸미고 똑 부러지며 정규직(?)이다, 기승전결 서사에 내용이 사이다에 치중되어 현실을 무시한다, 실제로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냐 등.
만화가 4컷이라 서사가 단조롭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나도 내가 왜 4컷 했는지 모르겠다. 4컷 짱 힘들다. 만평 좀 많이 읽어둘걸. 다양한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비판 역시, 내 공부가 더 필요하다. 특히 외모의 경우 처음 그렸을 때 모델이 나였고, 지금은 카페에서 흔히 마주치는 여러 여성을 모델로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비슷비슷 한 건 이 나라가 여성에게 다양한 외모를 허락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그냥 내가 그림을 못 그리는 거던가. 하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부터가 현실이 짜증 나서 그린 거거든.
나는 신이 아니고, 나도 사회 안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고 여성이다. 웹툰을 그리기 전에는 회사에 다녔고, 그 전에는 요식-서비스업에서 일했다. 나도 성폭력을 겪었고 페미니즘 한다고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래서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차별을 전혀 당해보지 못한 존재 취급을 받을 때 솔직히 맨스플레인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썅년이 되지 못해 힘들다는 당신의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내가 그 순간에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에 그린 에피소드가 정말 많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그 심정과는 별개로 나는 당신의 심리상담가도 아니고, 공공/공익기관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만화로 그릴뿐이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대처했어요! 혹은 대처 못했어요! 괜찮아요!! 나도 못하거든요!!! 그러니 상상에서라도 좀 시원해지면 안 되나? 하이퍼 리얼리즘 웹툰은 <며느라기><단지> 등 훌륭한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세상은 절대 안 바뀐다. 하루하루 살면서 더욱 뼈 저리게 느끼고 있다. 뾰로롱 여자들 임금이 높아지거나 뾰로롱 화장을 안해도 되는 사회가 되거나, 뾰로롱 남자들이 여자를 깔보지 않는 세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썅년이, 미친년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면 세상은 바뀐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는다. 내 만화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직접 행동했다는 사람을 보고 나도 용기를 얻는다. 전에는 상상에만 그쳤을, 여성 혐오적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끊기도 하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내 (꾸민) 외모를 보고 피하는 사람도 있고 내 작업에 겁먹은 사람도 있다.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기도 하고 행동을 조심한다. 무서워서, 더러워서, 짜증 나서, 겁먹어서, 번거로워서, 근데 그렇게라도 바꾸고 싶다. 그럼 언젠가는 안해도 되는 세상이 오겠지. 사실 나도 그렇게 간이 크지 않아서 미친년 상모 돌리듯 사는 거 힘들다. 불이익도 정말 많다. 하지만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
페미니스트는 성녀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썅년이다.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기 PR시대이다. 하나도 안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끌어모아서 잘 살 거다. 잘 살고야 말 거다.
그런 의미에서 <썅년의 미학>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