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로 시작한 연애, 연애로 시작한 섹스.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by 민서영


아주 오래전에 읽은 연애 관련 서적에서, 연애 스타일을 사냥법에 비유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찍은 먹잇감이 잡힐 때까지 쫓아가는 사냥 타입인지, 떡밥을 잔뜩 뿌려두고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낚시 타입인지, 아니면 한번 붙잡은 사냥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덫 타입인지 같은 것이었다. 그 비유를 놓고 본다면, 나는 확실히 근거리 사냥 타입이다.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작살파.

곁에 있다면, 반드시 잡는다.


일단 누군가를 좋아하면, 온갖 육탄공세로 상대방을 굴복시킨 후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었다 보니 지난 연애들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상대와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썸"을 탄 후 "고백"을 하고 사귀는 것을 뜻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내 연애 관계는 대부분 섹스로 시작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런 육체관계로 시작한 관계가 과연 오래갈 수 있느냐고. 그런 질문이 다소 무례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여자를 물고기 등에 비유하며, 일단 섹스를 하고 나면 남자에게 잡힌 물고기가 되어 남자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여자를 소중히(?) 대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통념들이 세간에 이미 뿌리 깊게 박혀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모든 관계가 끝나는 시기는, 결국 알아서 정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혹은 내 경우를 봐도, 어차피 서로를 진득이 안 후에 시작한 연애던 하룻밤을 먼저 같이 보내고 시작한 연애던 연애가 끝나는 시기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앞서 말한, 사람들의 편견과 같이 섹스를 먼저 하지 않았다고 백년해로 하는 것도 아니고, 섹스를 먼저 했다고 금방 연락이 끊겨버린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연애에 있어서 언제나 문제는, 나와 상대방이 같은 페이지에 있지 않을 때니까.


사회는 말한다. 남자는 섹스를 ‘하는 게’ 목적이라고. 남자는 여자와 “하기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섹스를 한 후에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섹스로 시작한 연애가 잘 안되거나, 섹스를 한 직후 돌변한 남자보다는 그와 함께 한 여자가 비난당한다. 섹스 한 번에 그럴 남자라는 걸 못 알아본 네 탓이라고, “비싸게" 굴지 않은 여자의 탓이라고. 그런데 말이야,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다며 온갖 감언이설로 상대방을 녹여놓곤 하룻밤을 보내고 입 싹 씻는 변태, 아니 못돼 처먹은 놈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걸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


분명한 것은, 섹스만을 목표로 그것을 이루었다고 금방 상대를 헌신짝처럼 버릴 사람이었다면 언제가 되었든 그렇게 할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날 아침, 말똥말똥하게 눈은 떴지만 지금 손을 잡아야 할지, 뒤에서 안아도 될지, 어젯밤에 실컷 나눈 키스는 환상이었던 마냥 손끝 하나 건드리기 조심스러운 상태가 되어 안절부절. 한참 동안 상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상대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때부터 아슬아슬 줄타기가 시작된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방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안아준다. 이게 뭔데. 그러다 또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속으로 물음표 백만 개를 띄우고 따라나선다. 해장국 두 개 시켜놓고, 깍두기나 우적우적 씹다가 국에 다대기를 넣다 말고 갑자기 빡이 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무슨 관계야?" 그럼 뿅, 결정권은 상대에게 넘어가 버린다. 그런 떨떠름함을 영원히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내가 원하는 상대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섹스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 이 남자 좀 아닌 것 같은데, 술 몇 잔 들어가니 괜찮아 보여서 섹스를 한 것인지, 이 남자 너무 타입인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섹스 한번 해보다 싶어서 했는지, 혹은 하도 들이대니 그래 한번 해보자 싶어서 한 것인지. 내가 정말 원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약 답이 "그렇다"라면 축하하고, "아니다"라면 앞으로 안 그러면 된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마음 쓰고 돈 쓰고, 시간 쓰는 과정을 모두 생략해서 다행이라고. 아주 오래된 노래 중에 그런 가사가 있지 않은가,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몸도 주니 떠나가버린, 왜 그런 놈이랑 했는지에 대한 분노와 쪽팔림이 물밀듯 들어오더라도 말이다. 하고 후회하는 선택지와 안 하고 후회하는 선택지가 있다면, 하고 후회하는 쪽을 택하겠다.


섹스가 너무 환상적이라, 혹은 X지가 딜도로도 못 만들 꿈의 형태라 생각나는 수준이 아니라면 하루 정도 쪽팔림에 이불 차고 개새끼 소새끼 X발 새끼 실컷 욕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사람을 물색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 놈한테는 눈물이 아깝다느니,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 봤자 1mL도 채 안 되는 몸속 수분일 뿐인데, 그 분한 마음을 꾹꾹 억누르는 것보다는 울 수 있을 만큼 실컷 울고 시원해진 기분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쪽이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매를 먼저 맞는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긴 시간을 매 맞는 채로 지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상처투성이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널브러져 우는 건 너무 아프다.

어쨌든, 자신을 책망하는 그런 경우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몸이 끌려서 만난 건 죄가 아니다. 섹스에는 죄가 없다.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

그러니, 적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섹스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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