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품: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
약 6~7년 전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당시, 나에게는 싱가포르인 남자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수더분하고 착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내가 먼저 그에게 고백을 했고, 우리는 곧 사귀게 되었다. 약 1년쯤 사귀었을까, 나는 사랑에 빠진 여느 소녀가 그러듯, "내가 왜 좋아?"하고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했을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네가 한국 여자라서 좋아."
한국 여자? 아, 그가 K-POP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 해도 이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내가 묻자, 남자 친구는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싱가포르 여자들은 너무 드세. 성공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남성을 상대로 경쟁하려 든다니까. 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그런데 우리 남자들은 군대도 가야 하고, 그런 여자들이랑 만나면서 데이트 비용도 내야 하고, 얼마나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니?"
엥, 이거 어디서 엄청 많이 들은 얘기 아니냐?
하지만 당시의 나는 흔히 말하는 '개념녀'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의 그런 반응에 가슴을 쭉 펴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우웩!)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잖아. 너는 한국 여자라서 예쁘고, 상냥하고, 착하잖아. 너는 싱가포르 여자들과 달라."
겨우 스물한 살이었던 나는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이었다면 싱가포르의 성평등 지수와 임금격차를 줄줄 읊어주며 조져 버렸을 것이다. 너 이 새끼 운 좋은 줄 알아라.
결국 그 남자와는 어떻게 되었냐면, 내가 영국 인턴쉽을 붙고 한창 기뻐하고 있을 때 학위를 포기하고 자신이 있는 싱가포르로 오라며, 자신은 집도 없고, 직장도 없지만 네가 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소름 돋는 일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 기준, 내가 그와 만났던 2012년 당시 싱가포르는 55위, 한국은 108위 (링크), 무려 여성평등 지수가 5위도 아니고!! 3위도 아니고!! 무려 53위가 떨어지는 나라의 여자를 상대로 "네가 그 나라 여자라서 좋다"라고 하는 그 배경의 이유가 너무도 투명하지 않은가?
(지금은 어떻냐고? 2018년을 기준으로 싱가포르는 24위로 올랐고, 한국은 115위로 떨어졌다! 하하하! 이제는 90위 가까이 차이가 난다!) (링크)
이런 나의 전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결코 낯설지 않은 여자들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여자친구, 배우자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 남자, 그것을 질투하고, 짓밟으려 드는 남자. 성공한 여성, 잘나가는 여성, 강한 여성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지 않았던가.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 성별의 사람들은 심지어 어느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고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평점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이것이 비단 특정 인종의 남자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정서라고 생각하면 참 아찔하기 짝이 없다. 국내만 해도 일본 여자를 "스시녀"라 멸칭하며 그들은 남성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사근사근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아시아권 밖에서는 동양 여자들이 '자기네 나라 여자들'처럼 위협적이지 않고 친절해서 좋다며 오리엔탈 환상을 투영하려 드는 "양남"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아, 이러나저러나 치이는 건 동양 여자들이네...)
확실한 것은, 자신과 동등한, 혹은 자신보다 잘난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는 남자는, 자기 나라에서도 정말 별 볼일 없는 남자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불알 두쪽뿐(이런 남자는 꼭 자지도 작더라)인, 그런 남자들. 그 자신에게 능력도, 재력도, 매력도 없으니 그것을 가지고 있는 여성을 후려치려 들고, 깔보고, 각종 단어를 붙여가며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남자들이 만든 사회 안에서, 너무도 많이 자신을 깎아내려왔다.
그래서 그런 남자들이 말하는,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말은 결코 '너는 특별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만약 못 믿겠다면 한번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 물어보길. 아마 나의 전 남자 친구가 한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을걸?
굳이 그것을 번역해보자면,
다른 여자들과 달리 속물적이지 않다는 말은, 자신이 지질한 것을 이해하라는 뜻이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착하다는 말은, 그러니 내 말에 토를 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국밥을 잘 먹는다, 우리 엄마에게 잘한다, 사치를 하지 않는다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컨트롤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가스 라이팅이다.
그러니 입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어디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시지.
"너는 잘 속아 넘어가 줘서 좋다"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