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헤테로 유성애자 페미니스트의 질문.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겠지만, 나는 남자를 아주 좋아한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남혐을 하냐 하곤 했는데(남자들이 으레 그러듯)사실 농담이 아니다. 난 남자를 정말로 좋아한다. 남자의 체취, 그들의 단단한 뼈나 근육의 무게 등, 여성인 내가 가지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남성을 나는 너무도 사랑한다.
과거에는 남친이 없었던 기간보다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던 적도 있고, 매 연애는 미드 뺨치는 사랑과 전쟁이었으며, 그 경험을 칼럼으로 담을 정도였으니- 여러 심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미디어가 주입한 사랑의 이데올로기에 홀렸을 수도 있고, 하여간 연애를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처럼 남자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예상컨데, 그 시기는 페미니즘을 접한 시기와 겹친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소위 말하는 "빻은 말”하는 사람을 더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인권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이나, 말끝마다 여자는~남자는~하는 이와는 애초에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 더욱이 연애 상대라면 얼굴도 조형미가 제대로 갖춰 졌으면 하고, 깔끔하게 옷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 그 와중에 불법촬영물을 찍지는 않는지, 친구들과 그걸 돌려보지는 않는지, 데이트 폭력범은 아닌지 확인도 해야하니! 그렇게 하나하나 뭐가 잘못 되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적당히 "괜찮은" 걸로는 만족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현대의 남녀 연애 구조가 가부장제의 답습이고, 남성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아예 연애를 '해주지 말아야한다'는 논리로 비연애를 주장한다.(첫 책을 냈을 때도, 남자를 '버리지 못 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래, 비연애, 할 수 있는 사람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아니라고!
난 연애가 좋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데이트하고, 손 잡고, 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그 모든 걸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한 사람의 헤테로 유성애자로써, 나는 결코 연애를 안 하진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나와 연애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그동안 내가 얼마나 후려쳐져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여자인지, 괜찮은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멋진 나를 사귈 가치가 있는 남자를 좋아하고 싶고, 나와의 관계를, 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의지가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어느 전남자친구와는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차가 불씨가 되어 결국 헤어졌고, 지금도 <썅년의 미학>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친다.(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하하.)
내가 연애를 원한다 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애 역시 개인의 선택이고, 그를 위해 스스로 타협하지 않기로 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최대한 빨리 정신 차리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스트로써, 그리고 한명의 헤테로 유성애자 여성으로써 가야하는 방향이 아닐까? 페미니즘이 그저 남자를 걸러내는 거름망 역할 정도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스며들어, 여성 전반의 삶을 바꾸는 것이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던가.
어차피 세상은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하는 남자는 선택 받지 못하고, 도태 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남자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자연계의 순리가 바로 그것이니까. 유전자를 남길 가치가 없는 이는 선택받지 못하는 것. 그런 남자들을 피해 골라가며 만나보기도 하고, 그럴 가치가 있는 남자를 '간택'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제대로 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연애를 하지 않는 것고 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이제 더이상 나는 연애가 결핍 된 무언가를 채워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좋아하는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싶다. 거기다 그런 사람이 날 좋아하는 엄청난 행운까지 겹쳐야 하고! 그런 연애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 아니겠어? 모두 ‘적당히’가 아닌, 그런 로또 같은 연애를 손에 거머쥐기를 바란다. 관성적인 연애 말고, 극적으로, 억세게 운이 좋은 연애를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의 달력에 외롭지만은 않은 연애없는 하루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