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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Mar 19. 2024

성숙한 남자의 향기

대화할수록 기분 좋아지게 하는 짝꿍의 어록

아주 가끔 기분이 꿀꿀할 때면 짝꿍 천재는 내 눈치를 살핀다. 


내가 조선시대 여자처럼 고분고분 싱글싱글한 여자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얼굴에 구름 끼는 날을 찾아보기 힘든 나다. 그러나 천재는 나의 미세한 기분 변화도 기가 막히게 알아 챈다. 그런 날은 인간 농담 제조기가 된 것마냥 웃긴 얘기들을 주렁주렁 만들어서 발사한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말 자체를 예쁘 한다.


몇 주 전 천재네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요즘 주말이면 부쩍 낮잠을 잔다. 식사 후 노곤해 보이길래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 또 (낮잠) 잘 거지?"

"아니 너 (식탁이랑 설거지) 치우는 거 보고"

"내가 안 치울까 봐. 안심하셔."

"아니, 네가 혼자 치우는데 외로울까 봐.."


심쿵한 한 마디로 그날 부엌일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마치 연중 크리스마스 찬가를 틀어놓고 지낸다 느낄 때가 있다. 이 남자에게선 가끔 영화에서 본 듯한 미쿡 젠틀맨이나 영국 신사 향기가 난다. 마초처럼 통 큰 상남자 같다가도 둘이 있을 땐 없이 다정해진다.





한 번은 천재의 꿈속에 내가 나왔다 한다. 배경은 지하철 내 전철 탑승구. 그날따라 내가 자기를 쫓아다니며,  머리가 좋다고 계속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다. 현실에서는 내가 그보다 머리가 나쁘다며 가끔 자책하는데, 꿈은 실제와 반대로 꾸기 마련인가 보다. 꿈속에서 그는 막 바삐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자꾸 '나 머리 좋다'며 못 걷게 방해해서 당황한 듯했다.


그래 꿈 속이었지만, 그 자리에 두고 다른 전철 노선으로 갈아타러 갔다 한다. 물론 나는 천재 옆에 계속 나타나,  따라다녔기에 둘이 끝내 함께이긴 했다 한다. 그러나 꿈속이라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를 귀찮게 느낀 찰나의 대목, 그 지점에서 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이다.


"우씨!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데, 내가 좀 자랑했다고 귀찮아한 거네. 역에 두고 가고"

"...."

"꿈속의 천재를 대신해서 현재의 천재가 벌을 받으"


그는 웃자고 한 말에 서슬이 퍼래진 나의 눈빛 레이저를 보자 적잖이 당황했다. 고문의자나 교수대를 방불할 분위기였다. 나는 그 틈을 타 검지와 엄지 손가락을 장전했다. 그리고 천재의 이마로 돌진해서 꿀밤 5대를 발사했다. 한 대만 때리려 했는데, 자꾸 헛손가락질에 명중할 때까지 직진한 것이다.


몇 분 후 혹시 기분이 어떨까 물었다.


"아까 꿀밤 5대 맞아서 어땠어?"

"1대 맞은 거 같았는데"

"죄에 비해 벌이 작단 의미인가?"

"응... 엉?"


가끔 얼버무려 내 말을 잠정 인정해 주는 그. 그의 너그러움은 예쁜 비언어적 매너이며 잔잔한 평온함을 준다.






천재의 어머니는 참 인텔리전트한 신여성 같았다. 천재가 대학 1학년 마치고 음악(작곡)하겠다고 휴학을 강행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셨다 한다.


"젊어서 그런 방황도 다 해보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잘 방황) 해"


대학 1학년이면 조급해하며 공부해라, 성공해라 닦달하기 쉬운 것이, 어머니들 마음일 텐데 말이다. 가끔 천재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말을 들을 때면, 참 배포 있고 품이 넓다 느낀다. 그리고 종종 천재에게서 그런 어머니의 여유로운 품이 스며 나온다.





며칠 전 천재가 친한 동창인 석철(가명)씨에 대해서 말할 때였다.


"석철이도 자수성가한 친구지. 와이프가 간호사고 학교 다닐 때 만나 부부가 되었지"

"의사, 간호사 커플이 꽤 되나 봐?"

"의대와 간호대가 가까이 붙어있어 학교 다닐 때 눈이 맞는 경우 꽤 되지"

"글쿠나. TV 드라마 같은데 보면 처갓집에 열쇠 3개 요구하는 그런 장면 있잖아. 학생 때 만나면 그런 거 요구 안 하나?"

"그니깐. 영악한 여자들은 (의사) 면허 따기 전에 학생 때 남자를 잡는 거지.""

"...."


난 '영악'이라는 단어가 왠지 이질감 내지는 반감이 들어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떤 거야? 나도 영악해?"

"넌 영악과는 거리가 멀지."

"그럼?"

"넌, 주님의 뜻이지!"

"그지? 어쩜 이리도 정답만 말하는지. 천재 맞네!"


짝꿍은 우리 인연이 작위적인 뚜쟁이의 결과물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말을, 내 세계관과 가치관을 배려해서 풀어 준 것이다. 명품 브랜드 한 번도 산 적 없고 심지어 천재 만나기 전까진 '사'자 남자는 질색하던 나였다. '사' 자 붙는 남자들을 혐오하듯 싫어했던, 오만한 나의 선입관을 나중에 알고는 불편했을 그이다. 혼수로 열쇠는 커녕 썸 탈 때부터 내가 가난한 집 딸임을 강조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전통이 있는데, 다들 시집, 장가갈 때 집에서 혼수 같은 거 하나도 안 해주었다고 못 박기도 했었다.


하지만 짝꿍 천재는 종종 나의 선입관이 담고 있는 이 사회 부의 불평등, 기득권의 만행, 없는 자의 편견과 아집, 열등감의 상처, 고집스러운 저항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 하다가는 "그랬구나"응수할 뿐이었다. 그는 인생이 품어낸 날 선 생각들을 담담히 품에 안아 주곤 했다.





천재는 최근 부쩍 나의 꿈을 자주 꾼다 한다. 1일 1 꿈은 아니지만 내가 무슨 꿈 꾸었냐고 물어보면 다섯에 한번 이상은 내가 출연하는 듯한다. 그래 한 번은 이리 물어봤다.

 

"어제도 꿈에 내가 나왔어?"

"그런 듯?"

"내가 꿈에 자주 나오는데, 출연료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까. 요즘 사는 것도 빠듯한데. 출연료 줘야겠다. 얼마야?"

"이그 농담이야"


그는 올초 생일날, 나로부터 일취월장 사랑상을 받은 바 있다. 근데 요 며칠 전부터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자기도) 일취월장 사랑상 줄까?"


2월에 조카 진국이 사업 관행으로 행했던 일로 세금추징을 당했다.(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 그 아이는 현재 어디서고 돈을 끌어모을 데가 없어, 이번에도 내가 영끌해서 추징된 1000만 원가량을 막아 주었다. 나름 건실하게 살고자 했던 청년이었다. 작년 초 사업실패와 결혼연기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오기도 했다. 사업이 잘 풀릴 때는 수입이 수억 원대였다는데, 그도 몇 년 못 갔다. 조카의 엄마이자 나의 친언니는 작년 8월부터 디스크 수술을 거듭하느라 올초까지 일을 잘 못 하고 있다. 그래 두 모자의 생활비도 나와 우리 형제자매가 몇 차례 돈을 모아 갖다 주었다.


천재가 내게 사랑상 줄까, 묻는 질문이 담은 함의를 알고 있다.


'너, 요즘 힘들지? 내가 힘이 되어 줄 테니깐, 어려우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줘'


그리고 실제로도, 천재가 조카일로 물질적 지원을 몇 번 해주었다. 연인 단계부터 이런 가정사를 보여야 하는  못내 창피했다. 며칠 전 그만 천재 앞에서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카한테도 내내 그 아이가 잘못했다고 거이 채근하지 않았다. 남자가 사업하면 몇 번 말아먹는 것은 무지기수이니 기죽지 말고 힘 내라고 했다. 그러나 작년 여름부터 누적 1억 원 가까이 이 모자를 도와주면서 정말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 들었다. 벼랑 끝에 선 자가 가족이든 누구든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는가. 다행히 그때 세입자가 준 전세보증금이 수중에 있어 5000만 원은 거기서 우선 충당했다.


허나 천재는 이토록 늠름한 이모의 모습 이면에 오래도록 견뎌온 삶의 무게와 눌림, 이내 서글픔을 읽고 있었다.


"그냥 이런 후진 모습들을.. 연애 단계에서(부터) 민낯을 드러내는 게 너무 서글퍼.."

"이그,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곤 살포시 내 손을 잡아주며 토닥여 주었다. 남자의 말이 성숙한 것은, 그가 나의 고통에 누구보다 마음을 다해 공감하고 배려해 주기 때문이다. 뭐든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 그윽한 이해의 눈빛과 공감의 말로 뽀송뽀송 말풍선을 남겨주는 내 남자.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세상을 피 튀기듯 처단하며 살아왔다. 그는, 사랑이란 단어를 혐오하듯 기피하는 내게, 공해와 같은 사랑타령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삶으로 또 비언어적 배려로, 그렇게 사랑 초보자를 기다려주며 가르쳐 주고 있다.


시간을 따라 퇴락한다던 전설 속의 단어는,

그의 곁에 머물러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성장 중이다.

절제된 그의 사랑 어휘는 삶으로 '먼저' 다가오기에 늘 정감 어리고 믿음직하다.



















*본 연재글 예정목차 : 개봉박두! 작가의 세계

※제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사진, 그림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본 글은 2024년 3월 8일에 발행했다가 홀딩했다가 내용을 보완해서 아예 새로 발행합니다.

그날 초반에 바로 댓글과 라이킷 주신 작가님께 거듭 송구하며 발행취소 기능 덕분에 아래 소개해 드립니다.

카타르시스 대목은 심사숙고해서 차후 다른 주제 때 다시 소환해 볼게요 :)  



댓글2


송주

Mar 08. 2024

왜 꽁냥꽁냥 달콤한 냄새가 전해지는 것 같죠? 두 분 보기 좋으세요...응가는 카타르시스 인정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이니 쾌감 역시 ...뒷말은 생략할께요.


청년 클레어작가

Mar 08. 2024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심심한 대화일 수 있는데요. 처음 연애 초기 우울증이 심할땐 무뚝뚝할 때도 꽤 있던 남자라, 이렇게 변화된 일들이 놀랍기만 하답니다. 카타르시스 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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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수 작가는 칼럼이나 에세이, 교양서적, 공학서적, 신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특별히 챙기면 특별히 좋아진다』,『거침없이 우뚝하여라』등이 있다.


커피소년   커피와 걷기 그리고 깊이보단 넓이를 추구하는 책읽기. 그래서 패치워크 같은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벼래  그럭저럭 굴러가는 유아특수교사의 일상을 담습니다.


오래된 타자기  늘 케케 묵은 책들을 읽으면서 사색에 잠기다 오래된 타자기처럼 한 자 한 자씩 천천히 타이핑하듯 글 쓰는 글쟁이입니다.


즐란  글쓰는 엄마와 그림 그리는 딸이 함께 합니다. 산에 사는 즐란 여사의 60년째 하루들!

 

우사기  여행•요리•일상을 기록합니다.


거칠마루  남을 도우며 살고 싶어서 소방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손영호  50세에 희망 퇴직을 하였습니다. 퇴직 후 저의 삶에서 의미 있는 일들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말랑한 마시멜로우  추억을 먹고 사는 말랑말랑한 50대 k-아줌마 입니다. 글쓰기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60이 되기전에 내 기억 속의 과거를 더듬어 본다는 생각으로 과감히 도전하는 관종아줌마이지요.


주난  안전업무 에세이


이기적인 도깨비  일상과 기억, 음악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공유합니다


열혈청년 훈  5개대학, 4개전공, 3개 회사 경험을 가진 9년차 변호사 열혈청년 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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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집밥을 하고 13년차 반려견과 함께 지내며 그냥 사는 이야기. 그래서 사는 이야기.그래도 사는 이야기 <그사이>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의 편한 그런 사이..‘그 사이’가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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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독  투자와 사업하는 청년입니다. 성공을 목표합니다. 험난한 과정들을 작가의 관점으로 써내려갑니다.(구 '생각하는 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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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이  안녕하세요? 다작이입니다. 매일 글쓰기에 4시간, 독서에 1시간 반을 투자하는 25년차 현직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언젠가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라, 틈틈이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해조음  색색의 인연 조각들을 모아서 조금씩 풀어 보려 합니다. 따스한 시선으로 격려해주시고 제 글을 읽고서 조금이나마 웃으신다면 글 쓴 보람이 있을것입니다. 행복하십시요


일조  부의 성장을 도와주는 집과 글, 아이디어를 드립니다.


집사 김과장  여행자. 20년차 집사.


최만섭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개인적인 역사를 가지게 됨니다. 나는 감히 그것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든 인간의 인격이 소중하다는 논리의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바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며, 앞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일상을 기록하고 평범한 순간을 행복으로 남기는 사람입니다.


글쓰는 김과장  글쓰는 김과장입니다.


금운사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 헛똑똑이의 기록도 기억보다 똑똑할까? 난득호도(難得糊塗)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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