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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Oct 10. 2020

내 안의 뱀 인형

화가 전희경 인물스마트소설

<내 안의 뱀 인형-화가 전희경 인물스마트소설>


  네 번의 허물을 벗자 날개가 돋아났다. 아직 마르지 않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올랐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름 위였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날갯짓을 해댔다. 구름만 바람에 휩쓸릴 뿐 더 오르지는 못했다. 여의주가 없으면 가벼워 높이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날갯짓을 계속해대자 구름이 저희끼리 얽히고설켜 대기의 물기를 빨아들였다. 밤이 되자 구름은 뒤뚱거리며 사리어 뭉친 물기를 밤새도록 발산했다. 

  날이 밝아오자 구름은 사라졌다. 햇볕이 따가워 땅으로 내려왔다. 처마 홈통을 타고 내려가는 빗물 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작업실 창을 열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땅에서는 비릿한 향이 대기에는 바짝 타들어 간 숯의 향이 났다. 물방울의 세례를 받은 도로는 매끄러웠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의 우듬지가 성큼 자라 산이 가깝게 느껴졌다. 항상 비가 오고 나면 그녀는 부쩍 자랐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삐져나왔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던 햇살이 퍼지더니 사방을 온통 뒤덮은 물방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햇살을 가로질렀다.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과 달리 땅의 바람은 상쾌했다. 그녀는 들뜬 표정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캔버스를 짜고 남은 길쭉한 자투리 천을 펼치고 붓을 잡았다. 그녀의 붓은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붓이 상쾌한 바람을 타고 물감을 휘갈기고 덧칠했다. 기교 부릴 틈도 없이 그녀의 마음을 따라 붓이 움직였다. 캔버스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언젠가 그녀와 함께 가서 봤던 산과 물이었다. 붓이 저절로 물감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온몸의 세포를 다해 흥겨움에 몸을 맡겼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나자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그녀는 나를 창조하느라 길게 뻗은 구름이 밀려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지점토로 나의 형상을 완성하자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오고 비가 쏟아졌다. 그녀는 아직 단단하게 굳지 않은 나를 안고 커튼을 젖히듯이 빗줄기를 가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빗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그곳은 촉촉한 물방울을 머금은 숲이었다. 그녀는 숨에서 나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녀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생명을 얻은 나는 그녀 발 가까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머리는 그녀의 얼굴을 닮았고 몸은 팔다리가 없는 뱀이었다. 힘겹게 나뭇가지를 넘던 나는 눈을 끔벅이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방금 허물을 벗은 나의 촉촉한 피부를 매만져 주었다. 나의 모습은 사람에게서 뱀으로 또는 뱀에서 사람으로 가는 혼돈의 상태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의 현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나의 친구들을 더 만들었다. 

  그녀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친구들의 몸에 숲의 색을 입히고 꽃을 그려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우리는 전시장 유리 받침대에서 스폿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만끽했다. 사람들은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팔다리가 없는 뱀 같은 우리를 보고 감탄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우리를 예쁘게 보면 볼수록 실망했다. 우리를 현실 공간에 내 놓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시회가 끝나자 그녀는 나를 작업실 창틀에 올려놓고 매일 나의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내가 창가에서 첫 허물을 벗자 그녀는 잠시 접어 두었던 캔버스를 꺼내서 창밖을 바라보는 나를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나는 캔버스로 옮겨져 혼자 큰 화면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 그녀는 내가 힘겨워 보였는지 나를 캔버스에서 빼내고 배경만 남기더니 한동안 배경만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배경만으로 표현하는 현실 공간은 도시의 풍경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삭막한 도시의 풍경이 싫증났는지 도시의 직선적인 요소를 빼고 동그란 이미지를 수없이 겹쳐 도시의 다양한 욕망이 혼재된 공간을 그렸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날 그녀가 나를 안고 갔던 촉촉한 숲속 같기도 했고 그녀의 새로운 휴식 공간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 공간을 붓으로 뭉개고 해체하면서 엄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절대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붓질로 자신의 공간을 위장했지만 나는 그녀가 그곳에 편안한 둥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의 캔버스엔 자연의 색, 자연의 이미지들이 뱀처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붓을 잡고 숲을 걷어내고 안식의 공간으로 들어가 입구를 막고 편하게 쉬다가 나왔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 숲의 입구를 서성거리다가 그녀가 편하게 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녀는 휴식을 끝내고 안식의 공간에서 나와 밖으로 나갔다. 비가 그치면 언제나 나를 안고 촉촉한 나뭇잎을 스치며 공원의 작은 숲으로 갔다. 이미지를 낯설게 기록하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요소들까지 섭취하며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내가 무거웠는지 나를 작은 숲이 우거진 공원에 내려놓았다. 세 번째 허물을 벗자 내 몸집은 한 손에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큼 자랐고 몸의 얼룩무늬도 늘어났다. 나는 감춰 접어두었던 네 개의 다리로 숲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그녀가 나를 쫓아왔으나 쉽게 따라붙지 못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기다려주다가 가까이 오면 또 달아났다. 그녀는 나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품을 떠나기로 했다. 그녀가 나를 그리워하며 숲을 헤맬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위해 멀리 떨어져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작업실에 들어간 그녀는 캔버스를 짜고 남은 길쭉한 자투리 천에 작업 중이던 그림을 세로로 돌려 보았다. 가로였을 때보다 더 생동감이 있었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덧칠하고 닦아내다 뒤로 물러나서 그림을 감상했다. 자유분방한 붓질들은 한 폭의 풍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산이 솟아있고 물이 흐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붓에 흰색 아크릴 물감을 잔뜩 묻혀 숲을 가로지르던 녀석의 궤적을 떠올리며 짓이기듯 그어 내렸다. 바람이 불었다. 물방울이 튀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세상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자유분방한 붓 터치가 만들어낸 풍경을 보고 동양의 산수화 같다고 했다. 비평가들은 풍경을 추상화시킨 낯선 이미지 안에다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안식의 공간을 유토피아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안식의 공간을 활짝 열어 사람들을 초대했다. 나는 그녀가 유토피아를 표현하지 않고도 유토피아를 창조한 것이 놀랍고 대견했다. 이제 나는 그녀의 여의주를 훔쳐 하늘로 올라갈 생각에 설렜다. 그녀가 나를 세상에 내보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여의주를 훔치기 위해 사람들을 따라 유토피아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여의주는 보이지 않았다. 여의주는 그녀의 또 다른 안식의 공간에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숨죽이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녀의 안식 공간에 등장하는 산과 물 그리고 바다 등의 자연적 요소에 눈을 떼지 않았다. 요즘 캔버스에 새로 등장한 것이 있다. 음기 가득한 밤의 공간에 달이 나타났다. 이번엔 달에 어떤 공간을 창조하려는 것일까.■



<화가 전희경 인터뷰 함축>

“사전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그리진 않아요. 구도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유토피아가 아니라 제3의 공간이에요. 내 작품에 등장하는 물리적 공간, 부피가 있는 공간을 보고 사람들은 산수화를 떠올리곤 하죠. 강이나 산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의 도피처가 그곳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현실의 도피처를 찾기 위해 그림을 그려요. 도피처가 상징하는 것이 꼭 이상향은 아니에요. 도피처는 안식의 공간이라 그곳에 가면 정적이 흐르기 때문에 편안해요. 그러나 도피처의 정적은 지속되지 않아요. 정적이 사라지기 전에 빠져 나와 현실로 돌아오죠. 이러한 과정이 삶인 것 같아요.”


<화가 전희경 소개>

2006년 첫 개인전의 모티브는 개인적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다.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오브제에서 회화로의 확장을 거쳐 10여년을 지속했다. 2015년부터는 그 괴리감 사이의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을 탐구하고, 이를 추상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 공간속으로 들어가거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쾌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돌아와 있는 곳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드리고 현재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 신한갤러리 역삼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 2015 이랜드스페이스 <정신의 향연>, 2014 겸재정선미술관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이버 ‘헬로우아티스트(2015)선정. 에트로미술상(2015) 은상, 겸재정선미술관(2013)’내일의 작가 ‘대상.


<화가 전희경 대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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