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아이는 6개월이었고, 나는 혼자 아이를 데리고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으로 출발하는 길이었다. 남편이 공항에 나와 기다리고 있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아기를 데리고 8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아기는 징징거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도 편히 있을 수 없어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좀 있으면 탑승인데 아기가 쉬를 했다. 마음이 급해 짐은 그대로 둔 채 기저귀를 챙겨 아기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앞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중년 남성들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말을 걸어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으니, 생후 6개월 차, 심히 꼬물꼬물 & 바둥거리는 아기를 데리고 끙끙거리는 내 모습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나 보다. 그들에게 기저귀를 바꾸려 화장실을 가려한다고 하자, 그냥 앉아 있는 소파에서 바꿔도 되지 않겠냐며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되물었다. 아기 기저귀를 바꾸는데 그걸 이해 못할 사람 없다며 그중 한 명은 "나는 아이들이 셋이에요. 세 명을 키웠다 보니 아주 잘할 수 있죠. 원한다면 기저귀 바꾸는걸 내가 대신해 줄 수 있어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앞자리 중년 남성들의 비호(!)를 받으며 아이의 기저귀를 무사히 바꾸고 탑승하여 자리에 앉을 때까지 여러 도움을 받았더랬다.
이후 2주 시간을 보내고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앞좌석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이 아기가 너무 예쁘다며 안아봐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아이를 안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보니 내 어깨에 걸쳐진 아이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식사시간에는 나보고 편히 밥을 먹으라며 아기를 대신 봐주고, 그러다 분유를 달라더니 먹여주고 무릎에 앉혀 트림까지 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어프랑스 승무원은 나에게 와서 "마담, 마침내 유모를 구하셨군요! 홍홍홍" 하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당시 우리가 프랑스어로 대화를 했고, 파리행 비행기에 함께 탑승하였으니 그들은 프랑스인들이거나 벨기에인이었을 확률이 높다. (중년 여성은 스위스인이라고 말함)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오랜 시간 경험한 나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공감에서 비롯된 유머와 관심이었지 엄청난 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문화에서 타인을 대할 때 몸에 밴 기본적인 친절 딱 그만큼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느낀 고마움은 육아를 하는 절망감과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더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상황을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육아의 힘듬을 잊을 수 있었고,두고두고 생각나는 추억이 되었다.
1. 타인에게 불친절한 대한민국, 육아하는 아줌마를 보는 시선은?
18개월 때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와 키우면서 이따금씩 이 상황이 떠오르곤 했다. 아니 그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무엇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육아하는 고충을 이해한다는 따뜻한 시선을 느껴보고 싶었다. 좀 더 바랬었다면 사람들이 친절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집 밖에서 아이의 과도한 움직임에 쩔쩔맬 때마다, '영화 속 김지영이 카페에서 받는 수군거림'과 같은 상황을 나 역시 겪을 때 나는 혼자 절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변 어디에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져 아이와 있는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외로웠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깊이 공감하였던 것은 김지영이 유모차를 발로 밀면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뒤에서 수군거리는 미혼남녀들의 비아냥에 대해 할 말을 속 시원하게 해 줄 때였다. 지하철에서 똥을 싼 아이를 공중화장실에 데려가서 기저귀를 바꾸고 나오다 화장실에 다시 들어갈 때는 울컥했다. 나 역시 그런 시간들을 매 순간 힘들게 겪으며 네 살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미혼이었을 때 나는 아이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좁은 공간에서 열 시간 이상을 함께 버텨야 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인근 좌석에 아기가 앉아 있으면 일부러 멀리 자리가 바꿔지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그 부모와 아이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육아에 대한 정보가 없었으므로 그 시기 양육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직접 육아를 해 보며 느끼는 것은 육아는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아이가 자라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연대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육아를 하는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도록 인식을 바꾸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예를 들면 중, 고교 때부터 육아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적성을 미리미리 확인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정규 교육에서 제공하는 것은 어떠한가? 산후우울증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그저 개인의 불행이라 생각하지 말고, 무관심과 무지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오해와 비극이라는 책임감으로,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보자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어느 집에서나 벌어질 법한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저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면 '모든 아이들은 옳다'
2. 왜 아기에만 관심을 가지나요? 출산한 엄마는요?
산후우울증으로, 육아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엄마들에 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저출산 극복을 위한 국가예산은 산후 여성들을 위한 관리에도 쓰여야 하는 것이 맞다. 아기들 예방접종만이 아니라 아이가 생후 네 돌이 될 때까지는 국가에서 출산여성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열어두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면서,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이도 죽을고비를 넘기기 위해 35만원을 정신과치료에 써야 했다. 국가에서 상담센터 상시운영이 어렵다면 이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은 어떠한가?
산후우울증과 육아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엄마들에게 사회의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자. 의무적인 검사든, 선택적 검사든 그들을 위한 우리 사회의 공감과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나도 한 때는 얼마든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던 엄마였다. 몸의 피로와 정신적 한계가 극에 달하니 진심으로 고백컨데 아기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었다. 다행히 친정에서 가족의 공감과 관심으로 그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행운을 얻었지만 말이다.
3. 노키즈존이 필요한 사회라고요?
요즘 우리 사회는 노키즈존에 대해 논의를 한다. 우리나라에서 노키즈존을 운운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육아를 하는 고충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관심 결여에서 비롯된 저열한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육아를 직접 해보지 않은 다수의 남자들이 여전히 많은 사회다. 한 세대가 더 바뀌어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싫어하던 내가 육아현장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른바 '맘충'이 된 이후로는 아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로 바뀌었다. 아이는 엄마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즐거운 외출도 사실 다녀보면 녹초가 되기 일쑤다. 걷지 않고 안아 달라는 아이를 하는 수 없이 휴대용 유모차에 태워 서울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녀 보면서 분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접은 휴대용 유모차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를 먼저 올려 제대로 붙잡아 주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하는 것도 힘든데 그 와중에 아이가 넘어져도 본체만체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승객들, 지하철에서 잠든 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가 차지하는 공간이 불만스러워 위아래로 엄마와 아이를 훑어보는 사람들,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다며 짜증나는 표정으로 주문을 받는 카페의 직원 등등 그런 상황을 한 두 번 겪다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예민하게 받아들이자면 내 자존감에도 영향을 준다. '하루 종일 애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이 그지 같은 삶이라니' 그렇게 우울함이 더해진다.
노키즈존 /키즈존을 구분하자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감과 관심의 부재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사유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자원낭비다. 보다 쉽게 해결하자면 요란법석 한 키즈들과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육아맘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인들만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들면 된다. '애 키우는 심정 모르는 어덜트존'이 좋겠다. 그러니 노키즈존을 원하는 이들은 그들만의 출입이 허용되는 어덜트존으로 만들어 그곳으로 가라. 육아를 경험하여 보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우선이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키즈존이 요구된다면 이 사회가 과연 건강하고 바른 사회인지를 되묻고 싶다.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연대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