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연속 커피가 안 들어가니 얼떨결에 카페인 디톡스를 하게 되었다. 낮잠시간이 생겼고 약간의 저녁 두통도 생긴 것 같긴 한데, 밤잠은 또 되게 빨리 들고... 뭐 그렇다고 내가 막 커피 맛을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커피 안 마신 탓을 하기에는 좀 부족한 사람이다.
어쨌든 오늘은 어떻게든 커피를 마시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 6시 45분에 새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평소처럼 더 자고 싶거나 몸이 무겁지 않았던 것 같다. 혹시 카페인 디톡스 때문인가... 그렇다면 쭉 카페인과 이별하겠는가... 어려운 결정이 될 것 같다-
파머스 마켓, 22달러치 과일
아이들을 보내고 온 남편과 어딜 갈까 의논 끝에 큰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릴리코이(하와이산 백향과)와 라이치를 사러 파머스마켓에 가기로 했다.
코나 공공도서관 옆 주차장이라 도서관 구경을 좀 하고 나와서 바로 옆 공공주차장 쪽에서 열리는 파머스마켓으로 향했다.
작년에 좀 비싸고, 에누리도 안 되는 어떤 곳에서 과일을 샀더랬다. 라이치를 가지째 하나 사고 망고 두 개, 릴리코이 너댓개를 샀다. 파운드 뭐라뭐라 하시곤 내게 말씀하시는 가격이 뚜에니씩스딸라!
하필 현금 가진 것이 23불뿐이라 쓰리딸라 디스카운트 해주실 만한 잇몸 만개 미소를 날렸더니 장난 없이 릴리코이 두 개를 빼가셨다.
그래도 기억에 너무 맛있게 먹었던지라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위치는 바뀌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작년보다 과일 종류도 덜하고 상태도 되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채소는 싱싱한 편이었다).
큰 망고 하나 7달러, 익다 만 릴리코이 네 개 들은 한 봉지 6달러,라이치 10개쯤(내가 직접 괜찮은 거 골라 넣음) 9달러.모두 합쳐 22달러. 에누리 안 해주시던 사장님인데 20달러에 해주신다. 오오~
봉지째 뒷좌석에 싣고 도토루 커피농장으로 출발.
코나 벨트로드
전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잠시 코나 벨트로드를 짚고 넘어가자면 유명 커피농장과 커피빈 판매처, 카페가 많은 도로이다. 일반 카페는 아니고 커피콩 직판장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농장과 붙어있는 곳들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
위에서부터 내려가면서 내가 아는 곳만 여러 곳이다.
훌라대디(커피빈과 굿즈 판매, 시음커피 외에는 커피를 팔지 않는다. 작년에 여기서 라테 달라고 했던 여인 여깄어요~), UCC(아포가토 유명, 커피 아이스크림 맛있다),도토루(방문객이 농장에 있는 각종 과일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음), 화이트네네(커피트럭이다. 로스터리 최고등급 자격증이 있는 걸로 안다. 사장님께 한국말로 대뜸 주문해 보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임), 코나조(날씨 좋은 날 가면 뷰가 예술. 도토루처럼 칼각으로 정돈된 뷰는 아니지만 그대로의 매력으로 충분하다), 헤븐리(알로하 씨어터 근처라며 남편이 알려줌), 그린웰(뮤지컬 선생님이 추천)...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일곱 군데나 알고 있고, 헤븐리 커피농장과 그린웰 팜스를 빼고 다 가봤던 곳이다.
카페인 플렉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제 글에서 언급한 오아후 한 달 살러 온 친구와 내가 자주 언급하는 그녀와 도토루 커피농장에서 보기로 했다.
파머스 마켓에서 도토루로 가려면 벨트로드로 진입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가 진입한 길 얼마 안 가서에 훌라대디가 있다.
오빠 스톱!
내가 너무 급히 말해서 살짝 지나쳤는데 마침 차가 오지 않아서 다시 되돌아갔다.
이틀 카페인 디톡스 후 처음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아님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건지. 특히 Laura's Reserve 가 매우 맛이 좋았다.
작년에 와서 여기서 라테 한 잔 마시려 했는데 제조음료 파는 곳이 아니라고 해서 시음커피만 마시고 왔던 기억이 또렷하다.그때는 비도 왔었고 당황하고 민망해서 뷰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두 가지 시음 커피를 조금씩 마셔본 후 더 맛있는 것을 택해 한잔 가득 담아 마시고 나오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약속 장소인 도토루 커피농장으로 가는 길 내내 흥이 났다.
작년에는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갈 수 있었고, 한 타임당 한 팀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올 해는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져서인지 셀프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1인당 5달러를 양심껏 낸 후 들어가면 된다.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쉽게 진입할 수 있게 잘 되어있었다.
도토루 커피농장 안에는 각종 과일나무들이 있는데,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따 먹을 수 있다. 열매를 따서 맨 아래, 커피를 파는 데스크로 가져가면 친절한 직원분이 씻어서 예쁘게 담아주신다.
아주 덜 익은 것을 따거나 대량 수확하지만 않으면 된다.
파인애플이 탐스럽게 자란 곳에도 푯말이 있었다. 같은 푯말인 줄 알고 읽지도 않고 한놈 큰 거 따왔는데 알고 보니 안된다고 써놨던 거였다. 작년에는 파인애플을 따도 됐어서 맘 편히 따버린 내 잘못이었다. 직원들은 친절하게, 기분 상하지 않도록 예쁘게 말하고 파인애플을 거둬갔다.
작년만큼 과실들이 많이 있지 않아 아쉬운 참이었다.
이 사진들은 흑역사 속으로 빠이빠이~ 관광지에서는 때마다 규범이 바뀔 수 있으니 웬만하면 푯말 같은 건 자세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인애플 말고는 오렌지 하나를 따갔는데, 친절하게도 다른 것도 함께 내주셨다, 예쁜 플루메리아 꽃과 함께...
작년에 이 뷰에 홀딱 반해서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꼭 다시 오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일로 예약을 따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기회를 놓쳐 버렸었다.
기쁘게도 올 해는 예약 없이 입장할 수 있어서 오늘 갑자기 달려와 이 미치도록 청량한 뷰를 남편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도토루 농장에도 시음 커피가 두 종류 있었는데 난 한 세 잔정도 마신 것 같다. 오예~ 오늘 나의 날이로구나~
파인애플을 압수(?) 당하며 농담을 주고받던 일본인 직원이 우리를 아니,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나만 커피를 마시고 남편은 물만 꿀떡꿀떡 마신 터에 더 그래 보였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직원들에게 허락을 받고 올라가는 길에 과일을 더 딸 수 있었다. 원래는 경사가 좀 있어서 돌아갈 때 셔틀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포기하고 좀 걷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라이치 나무 아래서 유심히 쳐다보다가 조금 높은 곳에 달린 열매가지들을 발견했고, 남편을 그대로 올려 보냈다. 허락까지 받았겠다 여섯일곱 개는 가져가도 될 것 같았다.
가지 두 개를 털어서 아홉 개의 라이치를 수확해 가지고 나왔다.
남편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데리러 알로하 씨어터에 갔다.
오는 길 내내 요 과일들을 빨리 맛보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케아우호우 쇼핑센터에 들러 어제 커피머신이 고장 나서 지나쳤던 클로버 앤 머그를 지나갔다. 한국인 사장님이 계셨다.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홀린 듯이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온 김에 나 여기서 커피 사줘.라고 당당히 말하지 않고 얘들아 망고빙수 먹을래?라고 했다. 그 길에 커피를 얹어서 주문했다. 내가 원하는 라떼는 아니었지만 카페인 플렉스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달달한 캐러멜 라떼가 나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고생해서 딴 라이치를 먹였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더없이 뿌듯했다.
다만, 파머스마켓에서 산 라이치들을 먹는 순간, 뭔가 잘못된 맛 같아서 거의 반을 버렸다.
릴리코이도 더 후숙 해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망고는 한쪽이 맛이 변해서 시큼톡톡했다. 내 그 필리핀 가족 가게는 다시 들르지 않으리...
클로버 앤 머그는 한국 청년들이 창업한 빙수 카페다. 맛이 궁금했는데 설빙보다 업그레이드된 우유의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눈꽃빙수였다. 정말 맛있게 싹싹 먹었다. 다음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쿠키앤크림 빙수도 먹어봐야겠다.
카페인이 10000% 충전되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하루였다.
다음에는 남편이 가보자고 한 헤븐리랑 현지인들이 추천해 준 그린웰도 가봐야겠다.
아이들과 함께 도토루 농장에도 다시 들러볼 예정이다.(아이들은 입장료 무료!)
7박 8일 첫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
작은 아이가 어젯밤 자기 전에 내일은 꼭 엄마도 수영장에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대답을 했나 보다, 그러겠다고... 오늘은 약속대로 들어오란다.
작년에 42일을 살면서도 허연 뱃살을 드러내는 건 부끄러웠다. 나시도 절제된 선 안에서 겨우겨우 입었다.
하지만 누가 봐! 올해는 부끄럼을 내려놓고 편하게 즐겨보기로 했다. 그래서 작년에 왔을 때 사놓고 딱 한번 안에 입었던 탑을 입고 입수했다. (역시 내편 남편이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즐거운 추억만 남게 해 주었네)
슬슬 짐을 쌀 때가 되었다.
호스트에게 10시 20분에 퇴실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들을 캠프에 데려다주고 오면 10시가 넘는데 10시 체크아웃 시간을 지키려면 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모든 짐을 트렁크에 싣고 다 같이 출발하거나, 나 혼자 주차장에서 남편이 올 때까지 짐을 지켜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도 여유가 생겨서 일단 짐을 조금 싸놨다.
새로이 33박 34일 동안 묵게 될 곳으로 옮기려면 오늘 일찍 자야 하는데, 카페인 플렉스 해서 어제보다 말똥한 정신으로 새벽 1시 반이 넘도록 글을 쓰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