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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Oct 16. 2020

본격추리, 본격연애, 본격결혼

<대나무가 우는 섬> | 송시우

"와! 이게 제주구나!"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덥고 습하지만 맑은 공기, 육지와는 다른 나무와 여행객들의 모습. 관광지인 제주에 도착했다. 여름휴가를 맞춰 처음으로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우리는 만장일치로(?) 제주에 가보기로 했다.


제주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고, 제주는 멀지만 가까운 관광지였으며, 명한이 제주도를 잘 알고 있기에 여행 계획을 짤 때도 편할 거라 생각이 되었고, 여름 바다도 보고 싶었다. 나는 이때까지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사실은 열 살 때 가족여행으로 갔었다는데 너무 꼬꼬맹이 시절이라 기억이 거의 없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몇 가지 연애할 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서로 음식, 취미, 습관, 휴식 태도, 취향 등이 대체로 일치해서 목록을 작성하기가 쉬웠다. 생각나는 대로 작성하다 보니 중구난방이지만 다양한 것들이 목록에 올랐다. 야간 고궁 관람, 스키장 가기, 재래시장 구경, 스케이트 타기, 당구 같이 치기, 맥주 만들기, 한강에서 치맥하기 등등. 그중 하나가 제주도 여행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는데 어느 여름 드디어 같이 여행 날짜를 맞추게 된 것이다.


명한은 익숙한듯이 렌터카를 빌렸고 나는 보조석에 앉았다. 그리고 이윽고 제주 시내를 달리기 시작했다. 

"와! 바람 엄청 상쾌해!"

처음 맛보는 제주에 잔뜩 들떠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했다. 제주 해변 도로를 달리는 것도, 별 거 아닌 길가의 조형물도, 뜨거운 햇살도 그저 마냥 좋았다. 

이때는 몰랐다. 이 날 쫄쫄 굶고 다니게 될 줄은.


제주 서쪽에서 관광을 마친 저녁. 명한은 자신이 좋아하는 중국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 본 탕수육 중에서 가장 맛있는 탕수육을 만드는 곳이라며. 제주도에서 웬 중국집인가 했지만, 어차피 나도 탕수육은 좋아하니까. 


자신만만하게 날 데리고 그 중국집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중국집이 휴점일이라며 문을 닫았다. 명한은 당황해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제주 이쪽으로 가면 여기에 가 보고, 저쪽으로 가면 거기를 방문해야지'라는 계획을 머릿속에 세워둔 듯했다. 나도 별 일 아니라며 다른 맛집을 찾아보자 했다. 



© timmossholder, 출처 Unsplash




제주 서쪽에 있던 우리는 어차피 숙소가 제주 시내에 있기 때문에 한 시간 반 가량 이동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가는 길목에 있는 밥집을 찾아보자 했다. 여름인데도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으니 달리다 보면 어두워질 터였다. 서울과 달리 적막한 도로를 달렸다. 학생 시절 이야기, 최근에 겪은 에피소드들을 풀어놓으며 한 여름 제주의 저녁을 즐겼다. 슬슬 배가 고파졌다. 


"여기도 닫았네."

그렇게 달려서 간 생선구이집. 역시 맛있는 집이라며 의기양양하게 날 안내했지만 우릴 맞이하는 건 불 꺼진 식당. 명한은 다시 열심히 머릴 굴리기 시작했다. 숙소 근처에도 아는 맛집이 있으니 가자고. 기왕 가야 하는 길이니 그러자 했다. 9시가 넘었고 배에서 나는 공복의 소리는 숨기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근처 편의점에서 간식이라도 간단히 먹을 걸 그랬지. 그때는, 이렇게 식당에 들어가기 어려울 줄 몰랐다.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식당은 너무 만석이었다. 

"사장님, 자리 날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

"사십 분은 계셔야 할텐디."

사십 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슬슬 배고픔에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바다 방향을 바라보다가 명한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우리 저기 가서 먹자."

당당하게 빛나는 M자 모양의 간판. 맥도널드였다. 








<대나무가 우는 섬> | 송시우 | 시공사 | 2016


받아랏! 본격소설이다!                                          


송시우 작가는 (내 생각에는) 한국 추리소설계의 스타 중 한 명이다. 한국 추리소설 작가 중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송시우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도진기 작가도 좋아하고,  황세연 작가 책도 좋아하고, 정명섭 작가도, 김재희 작가 소설도 좋아하고, 서미애 작가 책도 재밌게 읽었고, 정해연 작가도, 또...)


송시우 작가는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사회문제의식이 짙게 녹아들어 있는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라 생각했다. 작가 본인도 자신이 그렇게 여겨진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송시우 작가의 <라일락 붉게 피는 집>, <달리는 조사관>, <아이의 뼈>, <검은 개가 온다> 모두 시의성이 강한 추리소설이다. 작가 본인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란 점이 창작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 생각된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할 것만 같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적절하게 그리고 몰입감 있게 추리소설에 담았다. 


문장은 또 어찌나 잘 쓰는지. 작가의 작품 하나만 읽어보고도 바로 팬이 되었다. 주제, 전개, 캐릭터, 속도감, 결말의 매듭까지 매력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다. 무엇보다 글이 깔끔하게 잘 읽히는데 이야기의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사회적이고 구성이 반듯하다. 금방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 


그런데 이 작가가 '드디어' '마침내' '결국' '비로소' 본격 추리소설을 썼다는 거다. 앞뒤 볼 것도 없이 작가 이름만 보고 바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니 소감이 명쾌해진다. 작가가 대놓고 본격  추리 소설을 썼구나! 작가에게 한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의식을 잘 녹여낸 소설만 주로 썼던 작가라 사실 본격 추리 소설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본격 추리도 잘 쓰는구나. 그것도 완전히 정말로 대놓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만드는 추리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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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올라오는 시기에 외딴섬 호죽도에 사람들이 모인다. 새로 생긴 연수원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무작위로 선정된 8명.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곧 태풍으로 사람들은 섬에 갇히게 되어 연수원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방식으로 일행 중 한 명이 살해되어 발견되고 갑자기 연수원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기이한 피리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40년 전의 숨겨진 진실.

//


태풍으로 고립된 섬에 갇힌 사람들과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 피해자와 범인이 한정되어 있는 '클로즈드 서클'이다.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잘 떠오르는 구조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 소설에는 전승 민담, 암호, 기괴한 살인, 트릭과 알리바이 등등, 본격 추리 소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미덕들을 모조리 넣었다. 그야말로 작가가 '대놓고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뭐든 그렇겠지만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을 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일 거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트릭을 고심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개연성과 설득력이 있는 캐릭터와 서사도 만들어야 하고, 재미까지 넣어야 하니까. 어느 정도 추리소설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개성적이며 놀라운 추리소설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기쁘다. 추리소설 팬하길 참 잘했다 싶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과 창작으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불가능할 것을 정말 가능할 법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신간 추리소설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진다. 뭐, 현실에선 추리소설보다 더 놀랍고 미스터리한 일들도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말이다. 




장르 세분화의 쓸모와 무쓸모                                  


'본격 추리 소설'이라는 말은 아마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름 그대로 '본격적인' 추리 소설. 그러니까 대개 일반적이지 않은 난해한 사건, 명탐정,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주로 살인사건), 트릭과 해명이 있는 추리소설을 말한다. 쉽게 생각하면 셜록 홈즈 시리즈나, 엘러리 퀸의 소설들,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들, 반 다인이나 존 딕슨 카의 소설들, 또는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전일> 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고전적인 추리소설, 좁은 의미의 추리소설을 이른바 '본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 클래식 또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 본격 추리소설이 재밌는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과 논리력이 극대화된 이야기고, 독자와 일종의 대결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있을 수 없는 일의 가능함이 주는 재미가 또 어마어마하고.


추리소설 쪽을 보다 보면 그 안에서 또 세분해서 구분되기도 한다. 본격 추리소설, 사회파 추리소설, 일상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등등. 세분화된 구분을 알면 확실히 소설의 특성과 재미를 최대한으로 이해하여 읽을 수 있다. 보고 싶은 책을 고를 때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이만큼 읽어 보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구분이 크게 쓸모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장르가 무엇이든 재미있으면 그만, 이라는 이 한심한 독서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든저든 다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구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어 하나로만 정의하기 힘든 소설들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재미를 보는 것도 참 쏠쏠하다.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거란 기대감이 가득하다.







우리가 만나고 나서 제주라는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오니 나는 비로소 우리가 '본격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때가 되어서 하는 연애가 아니라 서로에게 진중하고 진실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짧은 여행을 통해 느꼈다.


여행을 가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신혼부부일지라도 잘 싸우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도 그런 위험할 뻔한 때가 여행 중에 있었다.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아 헤맸을 때, 저녁 먹을 식당이 문을 닫았을 때, 저녁 먹을 식당에 못 들어갔을 때 , 저녁 먹을 곳을 못 찾았다던가 그랬을 때 등등. 산 같은 거 오르기 싫어하는 명한을 데리고 성산일출봉을 올랐을 때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한참을 기다려서 입장해야 했던 식당에 갔을 때라든가, 너무 에어컨 바람이 차가워서 오들오들 떨었던 카페에 갔을 때라든가. 돌이켜 보면 싸우려고 하면 얼마든지 소소하게 짜증을 낼 수 있는 여름날이었다. 


그럼에도 유난히 즐겁게만 있다 온 것으로 기억되는 건, 모두 명한이 나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아껴줬기 때문이었다. 여행으로 사람의 면모를 보다 자세하고 다양한 쪽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직접 사람을 새롭게 겪고 보니 다시금 강한 확신이 들었다. 


결혼해야겠다, 이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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