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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Oct 22. 2020

사신 같은 탐정도 있다지만

<죽여 마땅한 사람들>

장면 1.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 이코노미석 한 좌석에 앉았다.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비행은 설렌다기보다는 지루하고 갑갑하다. 좁은 이코노미석에서는 몸을 이렇게 저렇게 돌려보고 틈새를 찾아 쭉 뻗어 늘려보고 통로를 따라 걸어보아도 몸이 쉽게 불편해진다.

'자면서 가거나 최대한 어떻게든 잘 버텨봐야지.'

갑갑한 몸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이완하려고 하는데 그때 내 오른쪽 팔걸이에 턱, 하고 올려진 물체. 뒷좌석 사람의 발이었다. 신발 벗고 꼬릿꼬릿한 냄새가 나는 양말 신은 발.



장면 2.

제주발 서울행 저가비행기 안. 체크인 한 내 좌석을 찾아가니 한 여성이 앉아 있다. 음, 내 좌석번호가 여기가 아닌가 보네. 아니, 맞는데?

"저, 여기 제 좌석인데요."

여자가 샐쭉한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여기 제 자리 맞거든요."

모바일 티켓에 찍힌 내 좌석번호를 보여주었다.

"여기 위쪽의 번호 확인해보시면 제가 자리가 맞습니다."

"무슨 말 하는거에요. 여기 제 자리예요."

아직 탑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좁은 통로를 언제까지 막고 실랑이 할 수가 없어서 도움을 받고자 승무원을 불렀다. 승무원이 내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는 상냥한 얼굴로 여성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무지 요지부동. 대체 어떤 논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자리가 자기 자리가 맞단다. 이 자리가 특별히 좋은 자리도 아니고, 비즈니스석도 아닌데. 그러면서 나를 자기 자리 뺏는 사람인 양 노려본다.



장면 3.

서울발 제주행 비행기 . 비행기가 땅에 닿자마자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여기저기서 딸각딸각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나고 머리 위 선반에서 짐을 꺼내 내릴 준비를 한 채 통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거 나갑시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말했다. 하지만 통로는 이미 성격 급한, 혹은 바쁘신 분들로 이미 꽉 찬 상태였다. 비행기가 아직 지상에서 운행 중이었는데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통로를 가득 메웠다. 선반에 올려놓은 짐들을 찾고 옷을 입느라 통로가 아우성이었다. 도무지 내 발 한쪽도 드밀어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 거 나가자니까!"

"아니, 지금 나갈 수가 없는 상태예요."

왜 내가 변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보채는 아저씨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통로 쪽 상황을 알면서도 계속 나가자고 내 등을 밀었다. 움직일 수도 없고 안 움직일 수도 없고 화를 내기엔 상황이 너무 어이없었다.



명한이 들려준 최근에 겪었던 비행기에서의 일들   가지다. 아니  그런 답답한 상황에 자주 처하게 되는 걸까. 사람이 너무 순해 보이게 생겼나. 어떤 만화의 탐정은 하도 살인사건을 많이 만나서 사신”이냐고 하던데,  남자는 무례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라도 있나.


결혼을 결심하고 나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로의 자산을 솔직하게 공개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빚이 있는지 없는지, 월급은 어느 정도인지, 매달 나가는 고정지출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카페에서 나란히 앉아 우리의 자산과 예산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자니 '이 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한 게 맞구나'란 생각이 들어 갑자기 뭉클해졌다. 눈 앞에서 정리되는 자산과 예산의 숫자들을 보면서 갖가지 생각과 감상이 스쳐 지나갔다.


명한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커플통장을 만들기 잘했어. 덕분에 그동안 데이트할 때 크게 과소비하지 않았잖아."

우리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커플통장을 운용하기로 했다. 그 전에는 데이트를 할 때 더치페이를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밥값을 내면 다른 사람이 술값을 낸다던지, 한 사람이 영화 값을 내면 다음 날 밥은 다른 사람이 낸다던지 하는 식으로 자유롭게(?) 데이트비 부담을 져왔는데 어느 날 그게 영 마뜩잖게 느껴졌다.

같이 즐기는 거고, 둘 다 소득이 있는데 이왕이면 조금 더 공평하게 데이트비를 지출할 순 없는지 고민이 되었다. 매달 지출내역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나로서는 들쭉날쭉한 데이트비 결산 내역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명한에게 커플통장을 만들기로 제안했다. 그리고 한 달에 고정 금액을 정해 각각 입금하기로 했다. 마침 사용하지 않는 내 명의의 체크카드와 통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카드를 명한에게 주고, 통장과 내역은 내가 관리하기로 했다.


커플통장을 운영하면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았다. 일단 제한된 금액 내에서 소비를 해야 하니 절제하게 되기도 했지만, 점점 한 달 사용하고 남은 금액이 모여 몇 개월이 지나자 꽤 넉넉한 자금이 생겼다. 그 돈으로 여행도 가고 비싼 식사도 했다. 모인 돈으로 즐기니 공짜로 여행 가고 식사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통장에는 그동안 우리의 데이트 여정이 빼곡히 기록되어 우리의 역사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일기를 적지 않아도 지출 내역을 살펴보면 우리의 지난 날들이 보였다.


우리는 커플통장을 사용하면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커플통장 사용을 두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돈을 못 버는 거냐, 왜 똑같이 더치페이하려고 하냐, 대접받지 못하는 거 아니냐 등등.


아니, 내가 좋아서 하고 만족하고 오히려 장점이 더 많다는데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이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명한이 비행기에서 겪은 황당하고 기분 나빴던 에피소드까지 줄줄이 꺼내놓게 된 것이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푸른숲| 2016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 궁금한 뒷 이야기

우연히 읽기 시작한 소설인데, 한 번 읽기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그다지 두껍지 않고 내용이 어렵지도 않다. 게다가 속도감이 빠르다. 네 사람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책장을 휙휙 넘기게 만들었고 예상치 못한 사건의 흐름은 얼른 결말을 보고 싶게 해 주었다. 다 읽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공항 라운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 테드와 릴리는 비행기의 지연 시간을 기다리면서 대화를 나눈다.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이라 지금 이후로 영영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테드는 자신의 아내인 미란다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릴리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릴리는 미란다와 그 내연남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


어찌 보면 단순한 플롯인데 끌리듯이 읽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다.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솔직히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까.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 혹은 국가와 사회, 세계에 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때로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못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파급력이 크게 다가온다.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시작되어 살인에 이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이 점에서 피터 스완슨은 효과적으로 독자를 설득했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왜 살인자가 되는지 이해가 될 정도라고 하면 충분히 전달될까. 살인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무리 없게 이해되게끔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시점이 여러 번 바뀌는데도


무엇이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일까. 내가 만난 사람이 정말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인 줄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사람 간의 관계는 정말로 진실한 것일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추리소설은 어떻게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주려 하는가.



익숙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건 아니에요, 범죄에

추리소설 쪽의 책들을 읽는다고, 범죄와 살인이 난무한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고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든가 '추적 60분'을 보면서 무섭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현실의 사건은 언제나 창작 속의 일보다 더 무섭고 괴롭고 고통스럽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어도 현실은 더 잔인하고 아프다.


이런 미스터리 장르의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범죄에 동조하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범죄의 현실적인 추악한 면을 인식하게 된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범죄에 무덤덤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무서워서 보지도 못하는 사람, 여기 있다.


취향과 도덕은 별개의 문제. 때로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해지곤 한다. 남의 취향을 오해하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그저 독서를 좋아할 뿐이며, 잘 만들어진 이야기와 문제 해결의 쾌감, 권선징악의 정의를 좋아한다고 크게 외치고 싶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무례한 사람들에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래도 가시처럼 쏘는 말과 행동에도 나름 얻어갈 것이 있을 거라 생각도 해본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새옹지마는 우리의 모토가 되었다.)


"그래도 우린 결국 잘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잖아."

다정한 말 한마디. 여기저기 콕콕 쑤시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지쳐가는 일이 많아도 명한은 언제나 변함없이 다정했다. 언제고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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