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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Jan 05. 2021

02.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다.


배우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애초에 출발부터가 불순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수능을 대차게 말아버린 나는 다음날 가채점한 성적표를 놓고 담임선생님 앞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다 삼켜내지 못했다. 12년의 세월이 한 번에 날아간 것 같아서 허무하기도 했고 결국 이겨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겉으로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미안함이라 포장했지만 결국 그 감정들은 이겨내지 못한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재수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자신도 없었다. 난 생각보다 상황판단력이 빠른 아이였다. 아무리 말아먹었어도 수능은 끝이 났고 다음 스텝을 생각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고민을 하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미뤄뒀던 나의 열정을 발견했지. 그건 연극영화과 입시 카드였다. 입시 전형을 알아보니 수능 비중은 낮고 내신과 실기 비중이 큰 전형이 있었다. 내신 관리는 어느 정도 되어있으니 실기만 커버 치면 합격이 꿈은 아닐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였다.




한달음에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의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수능성적표를 받은 뒤 일주일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입시까지는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수업을 받았다. 꽤 비싼 수업료를 냈다. 예체능은 뭐만 하면 다 돈이라는 걸 실감했다. 연기에 대해 엄청난 걸 배웠다기보다는 연극영화과 입시가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입시 연기를 할 때엔 이름을 말하지 않고 수험번호로 인사한다는 것 같은 기본적인 것들 말이다.


자유연기 독백을 준비하며 여러 가지 대본을 읽었다. 그중 내가 준비한 대사 하나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서 밀러의 시련이라는 작품의 대사였다. 평생 읽어 본 희곡이라곤 언어영역에 나오는 작품들 밖에 없었는데 이때 학원을 오가면서 셰익스피어부터 시작해 현대 작품들까지 많이 읽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재수를 결정하거나 혹은 원서를 내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학교에서 의미 없이 영화나 보고 체험학습을 할 때 나는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했다. 나름대로 나의 승부수였다.




가군과 나군의 연극영화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시험을 봤다. 가군의 학교는 전날 소집해 대사를 나눠주고 다음 날 실기시험을 치르는 지정 연기가 과제였고 나군의 학교는 당일 나눠준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하는 즉흥연기가 과제였다. 그리고 두 곳 모두 특기를 하나씩 해야 했고 나는 뮤지컬 그리스의 넘버 중 “Beautyschool dropout”을 준비했다. 경쟁률은 당연히 일반 학과보다 훨씬 높았다. 경영학과처럼 규모가 큰 학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해 20명 남짓한 신입생을 각각 선발하기 때문이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하고 안경이나 렌즈를 끼지 않은 채 들어갔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덜 떨릴까 싶어서였다. 맨발로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서면 조명이 눈이 부셔 심사위원들을 포함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연기와 노래를 마친 뒤 몇 가지의 질문이 오갔다. 지원동기 혹은 연기 경험 등 으레적인 질문이었다.


어른이 되기 직전 내가 마주하게 될 험난한 삶의 첫 번째 도전이었고 시험장을 나왔을 때 눈이 많이 내려 있었다.



 

속속 친구들의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여기에서 판가름이 나지 않으면 어쩌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시험장에서 마주친 아이들은 다들 잘생기고 예쁘던데. 내가 감독관이라도 나는 안 뽑지. 그래도 결과는 모르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2차 실기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눈이 많이 내려 미끄러운 언덕 앞까지 부모님께서 차로 데려다주시고 끝나면 전화하라고 하셨다.


지난번과 같은 공기의 시험장에서 난 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사실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눈빛에 보이지 않았을까.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와 캠퍼스를 거닐며 신입생으로 다시 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집에서 옷가지와 짐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이미 새벽에 돌아가셨지만 내 실기시험에 영향이 미칠까 일부러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조금 분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잘할걸. 더 최선을 다할 걸. 난 언제나 나만 생각하는구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무 쓸모가 없다. 결국 이 지경을 만든 것도 나 자신이다. 수능만 잘 봤어도 이렇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참고 참았던 원망과 분노, 그리고 좌절감이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치고 갔지만 우는 엄마를 보면서 눈물은 꾹꾹 참아 삼켰다.




일상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고 초조한 기다림은 기약 없이 길어졌다. 불안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엔 아무 연락이 없다가 방심한 틈을 찾아 연락이 왔다.


합격이었다. 얼떨떨했다.


지난 12년이 아니라 마음 졸였던 지난 한 달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소리도 지르고 기쁨에 춤을 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했다. 아마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겠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신 외할머니가 주신 마지막 손주 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연극영화과 신입생이 되었다.



02.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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