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무상 Jan 09. 2021

04.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뒀다


스무 살. 참 어렸다. 


이 악물고 버티자는 마음으로 겉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지고 있었다. 넌 정말 연영과답지 않아. 마치 법대생 같아. 넌 옷을 왜 그렇게 거지같이 입어? 넌 잘하는 게 있기나 해? 농담처럼 흘려들을 수 있는 말들을 나는 전혀 흘려듣지 못했다. 그 말들은 매서운 칼날처럼 나에게 닿아 내 마음에 온갖 생채기를 만들었다. 


1학기가 끝나고 절반 이상의 동기들은 휴학을 했다. 나 역시 휴학에 대한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피하면 나는 완전 패배자가 되는 거니까. 지금 생각하면 조금 비껴서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괜한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를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꾸준히 묵묵히 열심히 하면 달라질 거라는 믿음.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 생각은 그저 그런 판타지였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남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것들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스무 살의 여름은 가장 칙칙한 빛으로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렸던 것처럼 그들도 우리도 모두 어렸다. 그때는 왜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나, 하는 원망도 있었다. 한 명이라도 내 옆에 있었다면 조금은 밝은 빛의 물감도 칠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미 마음속에 선을 그어버린 나는 먼저 다가가지도 다가오게 만들지도 않았다. 늘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기만 했을 뿐 그 시간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빛났을 스무 살은 그렇게 어둠에 묻힌 채 지나갔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 어둠 속에 나를 가뒀다.  




일 학년을 마치자마자 휴학을 결정했다. 지난 일 년을 악착같이 보낸 나에게 내리는 보상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시간이었을 연극영화과 신입생의 시간들은 생애 처음 겪는 좌절과 패배감의 연속이었다. 저 혼자 잘난 줄 알고 살았던 내가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정했다. 어쩌면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인정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내 청춘은 자기계발서와 달랐다. 비극 작품의 조연으로 나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확실함으로 시간을 보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적응 못한 낙오자가 아닌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나가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학과 생활에서는 존재감 없는 쭈구리 신입생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연영과 출신 대학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영과라는 단어를 꺼내는 게 굉장히 쑥스러운데 동시에 조금은 으스대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사람들은 나를 순전히 그 세계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다며 발버둥 쳤지만 실제로는 그 세계에 속하고 싶어 안달 난 거였다.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을 하며 학교생활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지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어 처음으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자신감도 많이 충전되었다. 신입생, 일학년이 아닌 나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사람들이었다. 아직까지도 살면서 마주하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의 해답을 인도에서의 기억에서 찾곤 한다.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눈 부시게 빛나던 여름을 보내고 초록 초록했던 나뭇잎들이 물들 준비를 할 때 즈음 학교로 돌아왔다. 1학년 2학기에 휴학을 했던 동기들 대부분은 2학년 1학기에 복학을 한 상태였다. 나와는 반대의 타이밍이었다. 1년 만에 마주하는 동기들도 어색한데 처음 보는 후배들은 더 어색했다. 휴학을 했던 2학년 1학기 동안 이미 형성된 관계 속에 들어갈 틈은 더 좁아 보였다. 학과 생활은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행사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갔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동기들에게는 여전히 말없이 웃기만 하는 친구였고 후배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배였다. 그렇게 인공위성처럼 학과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의 패배나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아끼는 이상 남들의 평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04.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뒀다 fin.

이전 03화 03. 어쩌면 내 자리가 아닐지도 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