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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Jan 22. 2021

15. 맞는 옷 맞는 사람

"우리야 고맙다"


잠깐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속절없이 애가 탔다가 이런 기회라도 어디냐며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했다. 마음이 좀 쓰릴 수도 있으니까 매운 것보다는 달달한 고기를 먹어야겠다. 마음속에서부터 이미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결론 지은 상태였다. 그래도 멀리까지 왔는데 점심은 사주려나. 같이 먹으면 어색하겠지. 이런 생각들이 뒤엉킨 채로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어색했다.


쭈뼛쭈뼛 들어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이제는 뭘 어떡해야 하나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선배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번에 다시 한번 대본을 리딩 해볼 건데, 태식이 아니라 ‘우리’ 역할을 읽어보자.”




캐릭터 ‘우리’는 극의 중심이었다. 앞서 읽었던 ‘태식’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인 캐릭터였다.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자 모든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인물이었는데 감정적으로 더 집중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더 잘해야지라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기대가 없었기에 편안하게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야 서로에 대해 잘 모른 상태에서 각자의 기대치를 갖고 지켜본 오디션이었다면 두 번째는 이미 뒤집어진 패를 봤기 때문에 그때의 마음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마음이 좀 편안해져 그런 건지 ‘우리’의 대사가 입에 더 잘 붙고 감정 몰입이 잘 되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를 읽었다.


다시 또 침묵이 이어졌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차가웠던 공기의 추위가 조금은 누그러졌고 알 수 없는 표정들로 선배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또 잠깐의 휴식. 나는 콧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연습실을 나갔고 그들은 그렇게 나의 거취에 대해 논의의 시간을 가졌다.




과연 이번 오디션의 결과는? 다음 라운드를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합격이었다.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제야 마음을 좀 편안하게 가진 채 웃을 수 있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우리’라는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 인물이라 염두에 둔 배우가 있었다. 그 배우의 스케줄 문제로 하차가 확정되면서 공석이 되어버린 ‘우리’ 역할은 내부적으로 이미지가 비슷한 ‘태식’ 역할의 배우가 대신 맡기로 되었다. 그렇게 공석이 된 ‘태식’ 역할을 위해 배우를 수소문했고 내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학교 수업에서 여러 가지 작품 실습을 하면서 눈 여겨 봐주신 선배님, 후배님 덕분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태식’의 대사를 읽었을 때 절망적이었다 했다. 이걸 어쩌지. 부르긴 불렀는데 돌려보낼 때 뭐라 말해야 하지. 배우는 또 어디서 구하지. 이런 식의 고민들이 오갔다고 한다. 나도 읽으면서 스스로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정도니까.




나에게 알맞은 옷은 ‘우리’라는 역할이었다. 딱 맞아떨어진 건 아니더라도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감정 신의 대사를 읽을 때 작품을 직접 쓴 연출가는 마음속으로 ‘됐다. 이거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씩 이야기하는 게 있는데 그때 ‘태식’을 읽자마자 나를 내보냈거나 ‘우리’를 읽어보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작품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이야기이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무섭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사이가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하고 혹은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을 꽉 쥐었는데도 바다의 모래처럼 사라지는 사이가 있다. 첫 상업연극의 합류는 작품을 올리는 것 이상으로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특히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들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고 혼자서 고민해왔던 불확실한 미래 등에 대해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주었다.


“우리야 고맙다.”



15. 맞는 옷 맞는 사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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