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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Jan 21. 2021

14.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잠을 설친 덕분에 아침에 일찍 눈이 떴다.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달랐다. 어제까지의 나는 이 시간들을 축내지 못해 안달 난 지나가는 청춘1 이었다면 오늘은 꿈을 위해 달려가는 눈이 초롱초롱한 청춘2 였다. 비록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하기 위해 간다는 것만큼 설레는 일은 없었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아침 샤워를 마치고 최대한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어릴 적에 낯선 곳에 갈 때면 체한 것처럼 몸이 아프곤 했다. 막상 가서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거면서 처음을 언제나 두려워했다. 어릴 적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전학을 자주 다녔는데 그때의 기억들이 내 머리 저편에 남아있었나 보다. 그때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것쯤으로 여겨 심호흡 한 번 하고 괜찮은 척했는데 머리가 클수록 처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졌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쳐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나면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면 그걸로 된 거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연습실은 성신여대 입구 근처에 있는 언덕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라 귀가 떨어지고 콧물이 조금씩 맺히는 것 같았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올라갔다. 얼마 정도 올라갔을까. 뒤를 돌아보니 서울의 풍경이 작게 보였다. 벅찬 마음이었지만 동시에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몇 번 내뱉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아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했다며 전달했다. 뭐든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는 게 좋고 말고. 이윽고 문은 열렸고 그렇게 나의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널찍한 공간에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학과 수업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는 후배가 한 명 있었고 신입생 시절부터 잘생겼다고 소문난 한 기수 위 선배가 한 명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까마득한 기수의 선배들이라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다. 어색하게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 나는 입술이 바짝 마른 채로 부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잔뜩 긴장을 해서 그런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다.


“음, 대본 한 번 읽어볼까?”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선배가 대본을 하나 건넸다. 제목 미상의 창작극이었다. 그는 내게 ‘태식’의 역할을 읽어보기를 권했다. 숨을 한 번 몰아 쉰 뒤 잠깐의 휴식 타임이 주어졌다. 아무리 형식적인 자리라지만 낯선 이들 앞에서 처음 보는 대본을 읽는다는 건 확실히 부담스러운 순간이었다. 게다가. 내 연기가, 내 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내게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말을 하게 될까. 그렇게 벌어지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을 한 아름 안고서 조심스럽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를 읽었을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우선 내가 읽는 대사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입 밖으로 내뱉고 있기는 한데 입에 붙지도 않고 어색하기만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나의 대사를 받아치는 상대 역할을 맡은 배우 분들도 느꼈을 것이고 하물며 이 작품을 직접 집필한 극작가이자 연출가는 더더욱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대본 읽기는 금방 중단되었다. 그리고 잠시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졌지만 사실은 다음 스텝을 위한 회의였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났다.



14.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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