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은 한겨울 동네에서 자주 가는 술집에서 시작되었다. 한숨을 쉬면 입김이 연기처럼 날아가는 추운 날이었다. 흘러가는 청춘을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답 없는 내일에 대한 허튼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 그때는 다 그렇지 않나. 술을 한두 잔 마시면서 지금의 현실을 탓하다가 결국엔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마무리하는 것. 빈 잔을 가득 채워 부딪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
서로 전화를 해본 적이 있나 싶었다. 잘못 누른 건 아닐까라는 고민을 살짝 하다가 술김에 전화를 받았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한 기수 위 선배였는데 군대에서 같이 뮤지컬을 하면서 한 걸음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래도 전화는 뭘까. 술에 취하지 않은 척 헛기침을 몇 번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이어지는 그의 말투는 의외로 담백했다. 내일 뭐하냐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어차피 할 일이 없었으므로 뭐가 없다며 멋쩍게 대답했다. 왜 물어볼까. 왜 나의 내일이 이 사람은 궁금한 걸까. 그렇게 짱구를 굴리고 있을 새도 없이 그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너 공연할래?"
갑자기? 내가 공연을?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들이 머릿속에 뒤엉켜 있었지만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몇 시에 어디 연습실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는 것으로 통화는 끝이 났다. 다시 술잔을 드는데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냐는 친구의 말에 묘한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나보고 공연 하라며 내일 형식적인 오디션 보러 오래!”
취기가 확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급하게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한 번 보는데 눈은 풀려있고 얼굴은 벌겋구나. 면도도 안 한 채로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동네에 나와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술을 마셨을 친구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이런 내가 공연을 정말 할 수 있을까. 그건 선택받은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닐까.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과연 내가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설렘과 걱정이 물 밀 듯 쏟아졌다.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일에 대한 걱정을 그때부터 그렇게 했었구나. 난생처음 보는 선배들을 만나기 전 설렘과 긴장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 오디션에서 내가 잘 못하면 어떡하지. 그들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너무 무서운 선배들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옷을 뭘 입지. 오디션이라는 게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어떤 작품일까. 어떤 사람들일까. 나도 그들의 세상에 들어가 함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