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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Jan 17. 2021

12. 욕을 해도 나만 할 거야

연영과스러워진다는 것

이제 눈 앞에 새로운 시작이 펼쳐졌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손에 쥔 작은 전역증 하나가 인생의 큰 숙제를 끝냈다는 안도감을 주기는 했지만 첫 단추를 어떻게 끼워야 하는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의욕만 과다한 상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지만 막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눈에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은 불씨만 남긴 채 청춘의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학교로 다시 돌아왔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복학생으로 신분이 달라졌다는 점과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다는 점이 달라진 것들이었다. 많은 선배들이 졸업 또는 각자의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면서 연습실을 들어가는 게 전만큼 떨리거나 긴장되지 않는다는 것도 달라진 것 중 하나였다. 일상은 단조롭게 흘러갔다. 군대에 있을 때에는 마주하고 싶던 일상이 막상 앞에 펼쳐지니 그 무게감은 금방 가벼워졌다. 우리는 늘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갈망하고 가지게 된 순간 흥미를 잃고 만다. 그렇게 대학생의 평범한 삶 속에 조금씩 젖어갔다.




4학기를 마친 뒤 평소 공부하고 싶었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예술학부가 사용하는 건물도 같고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부터 신문방송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연영과와 신방과를 병행하며 외도 아닌 외도를 시작했다. 연합동아리나 중앙동아리 활동을 통해 타 학과생들과 교류도 잦아졌는데 그럴 때 느끼는 시선은 언제나 신기함이었다. 연극영화과라는 출신이 사람들에게 이렇게나 흥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학과 내에서는 쭈구리처럼 지내지만, 그야 이들은 알리가 없으니까. 조금은 으스대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 연영과를 처음 본다며 호들갑을 떨 때면 애써 침착한 적 했지만 이거 이거 내가 연영과 이미지를 다 망치고 다니는 거 아니야?라는 묘한 불안감도 있었다. 그렇게 은근히 연영과 이미지를 즐기고 있는 와중에 다른 시선 또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번은 학회를 가입하려고 했는데 떨어졌다.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공모전에도 꾸준히 관심이 있어 학회를 통해 도전하고 싶었는데 다른 지원자에 비해 질문이 조금 편협적이었다. 연영과 출신이 학회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정도야 예상한 질문이니 무난하게 받아쳤는데 여기서부터 꼬리를 물더라. 연영과는 학과 활동으로 인해 학회 활동에 소홀할 수밖에 없지 않나,부터 연영과 출신으로써 학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느냐, 까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인터뷰가 끝나고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끼리 그 학회와 비슷한 이름의 모임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임에는 학회의 미래 임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수업 시간이었다. 전통과 권위는 물론 악명까지 높은 고인 물 교수님이셨는데 첫 수업부터 출석을 부르시며 예술학부 출신 학생들을 콕 집으며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더니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가관이었는데 “너희는 잘해 봤자 A는 못 준다. 왜냐하면 어차피 너희가 수업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며 시험 또한 잘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수업은 만만한 수업이 아니다. 그러니 듣기 싫으면 수강을 철회해라.” 는 선전포고였다.


솔직히 피하려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복수전공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학과 중 하나였고 학점은 채워야 했으니 조용히 입 다물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스스로 다짐한 건 무조건 이 과목은 열심히 한다 였다. 결과는 좋았다. 플러스 있는 A였다. 악착같이 따라간 수업의 결과였다. 학점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것보다 교수님이 가진 예술학부 학생들을 향한 편견이 깨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생각이 더 기뻤다.  




사람이 참 이상한 게 내 사람들을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은 안 된다. 연극영화과를 전공하며 학과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누가 욕하는 건 참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 내 출신이 연영과라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내가 우리 학과를 대표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배의 노력을 해서라도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괜한 정의감이었을 수도 있고 알게 모르게 배어버린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알게 모르게 연영과스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12. 욕을 해도 나만 할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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