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무상 Jan 14. 2021

10. 더 큰 무대에서 만나

잘 가고 있다는 믿음

큰 무대에 선다는 건 참 짜릿한 일이다. 까까머리 군인이었던 내가 대극장 무대에 서서 조명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관객 앞에서 준비한 연기를 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무대에 서는 수많은 배우들 외에도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숨 가쁘게 움직인다.


그저 무대 위의 배우가 빛이 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이 시간들은 작품 속에서 배우가 가져야 하는 역할과 자세에 대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연기라고는 고작 학교에서 수업 시간의 과제로 경험했던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기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함께라는 가치와 다수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하나의 목표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 또한 배웠다. 신입생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너희는 하나야.”라는 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열심히 했다. 남들은 군대에서 뮤지컬 공연을 한다니 꿀 빨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름대로의 고충은 분명 있었다. 모든 스케줄은 공연과 연습 위주로 흘러갔기 때문에 개인 일과 시간이 길지 않았다.


주말 같은 경우에는 2회 차 공연을 진행했는데 한 번 공연을 마치면 기진맥진해 손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지만 저녁 공연을 위해 억지로 먹으면서 힘을 냈다. 낮 공연을 마치고 저녁 공연 리허설 전까지 잠깐의 쉬는 시간이었는데 그때 잠깐이라도 쉴 수 있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가장 많았고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그랬다. 어차피 공연장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에 다들 극장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템포를 올려서 스피드 있게 저녁 공연을 마친 뒤 메이크업을 지우고 샤워할 때였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었다는 마음이 나에게 위안을 줬고 아주 조금은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순간이었다.




배우이기 이전에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만났기 때문인지 각자 비슷한 고민은 갖고 있었다. 다시 부대로 돌아갔을 때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야 가장 오래 군생활을 하다 온 편이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친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등병 때 오디션에 지원해서 온 친구들은 공연이 끝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기도 했다.


비슷한 꿈을 꾸는 친구들끼리 모여 함께 빛나는 미래를 같이 꿈꾸기도 했다. 모두 연기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지만 그 안에서도 원하는 건 달랐다. 각자 나중에 맡고 싶은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당찬 포부도 많이 주고받았다. 세상에서 내리는 편견이나 평가의 잣대 없이 오롯이 꿈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마음속에 충분했던 장면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열정이 넘치는 시기 중 하나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젊었으니 열정과 패기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용기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걱정에 휘둘리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의심은 적었다. 연영과 나와서 뭐 해 먹고살아야 하나, 라는 고민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의지를 믿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방황하거나 헤매기도 했지만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동선을 점검하고 대사를 맞출 무대가 있고 메이크업과 의상을 체크하는 분장실이 있고 관객들 앞에서 두 눈을 뜨기조차 힘든 조명 아래에서 공연을 할 극장에 출근한다는 것이 감사하기만 했다.




시간은 흘러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연장에 대한 논의도 지속적으로 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정해진 44회의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 공연을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대장정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 짧지만 달콤한 꿈이었다. 마지막 회식 때 다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울음바다가 되는 바람에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얼굴은 시뻘게져서 마치 아이처럼 우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도 조금은 울컥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뮤지컬 부대에서의 마지막 조회를 하며 우리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문화상품권 5만 원을 받았다. 다들 펑펑 울고 늦게 잔 탓에 두 눈에 퉁퉁 부은 채로 마지막 경례를 하고 각자의 부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중에 더 큰 무대에서 만나자는 말을 나누면서 말이다.



10. 더 큰 무대에서 만나 fin.


이전 09화 09. 이름 없는배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