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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Mar 10. 2021

07. 그렇게 여름이 오고 있었다

역시나 행보관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런데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잔소리에 꼬장에 모두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아무것도 안 시키면 좋지 뭐. 생각보다 싱거워서 오히려 걱정했던 과거의 내가 조금 머쓱해졌다. 나의 오디션 지원을 도와준 사무 계원의 주특기는 일반 사병으로 변경되었는데 오히려 그 친구는 그게 더 좋다고 말했다. 나의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파장이 크지는 않았다. 그렇게 여름이 오고 있었다.


오디션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메일도 없었고 연락도 없었다. 그래. 지원자가 그렇게나 많았으니 오디션 결과를 내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조급한 건 사실이었다. 일상에는 빠르게 스며들었다. 군대라는 게 그렇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일과를 하고 정해진 근무를 나가고 정해진 시간에 잠이 든다. 지금까지 큰 불만 없이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다 보니 점점 답답해졌다. 나가고 싶었다. 이 시간이 아까웠다. 가끔씩 텔레비전을 통해 친구들의 안부를 확인할 때처럼.


유격훈련을 한 주 앞두고 메일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훈련 준비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던 어느 오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같이 메일을 눌렀다. 서론이 길었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하다. 생각보다 많은 지원자가 몰려 결과 발표가 늦어졌다. 뻔한 내용이 몇 줄 반복되다 메일 하단에 합격 소식이 실려 있었다. 합격이었다. 귀하를 뮤지컬 배우로 파견하고자 합니다. 2주 뒤 소집이 될 예정이며 약 6개월간 진행되며 이후의 일정은 미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감격스러웠다. 대학 입시보다 감동의 크기는 더 컸다.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가장 컸다.


담담한 척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저녁 시간 내내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모두 나보다 더 기뻐해 줬다. 한참 동안 통화를 하느라 양 옆으로 여러 사람들이 오갔는데 동기 녀석이 오더니 전화로 내 자랑을 하더라. 내 친구가 이번에 뮤지컬 부대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가서 잘해야지. 꼭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여줄게. 내 꿈을 향한 첫걸음을 응원해줘서 고마워. 마음은 들떴지만 부대에서 하게 될 마지막 훈련인 유격훈련을 차분하게 준비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하루 24시간을 부대끼며 생각보다 더 깊은 정이 있었다. 특히 파견을 가 있는 동안 선임들의 전역을 곁에서 축하해주지 못한다는 게 참 많이 아쉬웠다. 내가 이렇게 즐겁게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다 좋은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지 못하고 나만 축하받으면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이들과의 시간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뮤지컬 부대로 파견을 가기로 한 전 날 밤. 조촐한 송별회를 열었다. 선임들은 내가 먼저 전역하는 것 같다며 기분이 이상하다 말했다. 나도 이상했다. 매번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만 했는데 내가 떠나는 건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간부님의 도움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까까머리인 우리들은 진심으로 서로의 미래를 격려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 기상나팔은 어김없이 우렁차게 울렸다.


아침 점호를 마치고 나는 커다란 더플백은 든 채 파견 신고를 했다. 물론 이 순간까지 행보관은 나를 모른 척했고 사인은 당연히 해주지 않았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목례로 대신했다. 뮤지컬 공연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거지만 작별인사를 하며 선후임들의 짧은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받았다. 한 손에 꼭 쥐고 짐이 많은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 차에 올랐다.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는 벅찬 마음에 숨을 내쉬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편지들을 꺼내 읽었다.


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기까지 30여분이 걸렸는데 그때까지 계속 울었다. 마치 나라 잃은 사람처럼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 안에는 그들의 진심이 있었다. 내가 꾸는 꿈이 나 혼자만 꾸는 꿈이 아니라는 말들이 가득했다. 지금껏 혼자서, 나 혼자서만 잘하면 된다며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었는데 이렇게나 내 주위에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발걸음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왔나 보다. 그렇게 퉁퉁 부운 눈으로 나의 뮤지컬 부대 파견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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