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단순히 친구라고 정의할 수 없는 나의 안정제이자 자극제인 사람. 같이 있다 보면 톱니가 맞물리듯이 나의 뾰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사람. 그냥 나의 20대의 전부인 사람. 내 생각이 일반적이진 않으나 기괴하지 않다고 확인시켜주는 사람. 그렇게 수많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관계를 정립해나간다. 그렇게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 언제나 내가 이 정도 순위는 되겠지”하는 개인적인 기대가 쌓이고, “나만큼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하는 호승심도 부리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자만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고 태어나면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부여받은 역할이 다르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100%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그리고 받은 이해가 사실은 반쪽짜리임을 알게 될 때.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과 상대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우리는 배신감에 휩싸여 화를 내기도 하고, 실망감에 낙담하기도 한다.
아직 어릴 때는 한없이 가까웠던 친구가 이내 멀어지기 시작할 때 슬펐고, 초조했고, 참담했다. 분명 일상의 대부분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는데. 서있는 위치가 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이 너무 이상했고, 나는 네가 제일 가까운 친구인데, 너에게는 나보다 더 가까운 다른 친구가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서운했고 마음의 한쪽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아팠다. 친구란 유년 시절, 학창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년 시절, 그 시절들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 그저 그뿐이었을 관계였는데, 나는 마치 내가 그들에게 “나”라는 곳에서 무슨 대단한 한 자리씩 맡게 해 준 줄 착각했다. 그래서 내가 준 자리에서 이탈해 나가면 배신이라도 당한듯한 느낌으로 바락바락 아파했다. 타인과의 관계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저 늘 같기만을 바랐었다.
멀어지면 다가가면 되는 것을, 그저 멀어지는 그들을 탓하기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멀어짐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우습게도 그들과 다시 가까워졌다. “사람이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그 흔한 명제를 진심으로 깨달을 때에서야 다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인간관계에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기대의 동물이라 아직도 제멋대로 실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앞에 거창하게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자니 민망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이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아무튼 친구란 ‘내 영혼의 파수꾼’이라든지 뭐 그런 대단한 대명사를 붙이는 존재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시작해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존재이며, 가끔 다시 같은 곳에서 만났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렇게 서로 8자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행자들이 아닐까. 우리는 서로 같지만 또 달라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서로를 보듬고 상처 주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것만으로도 무거운 인생을 버텨내기에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