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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머핀 Mar 07. 2021

히어로와 세상살이에 관하여: 물방울과 히어로


 인생이 고역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에서 보았던 히어로가 짠하고 나타내서 나를 구해내 주기를,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나를 빼내 주기를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허황된 꿈인걸 알지만 그래도 “누가 나 좀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대개 그곳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 경우가 많아 입맛이 써지곤 한다. 속된 말로 “내 인생은 내가 조진다”라는 느낌으로 살아가다 보면 요란한 등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미디어 속 슈퍼 히어로들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내 인생의 히어로는 정녕 나뿐인가? 쓰리게 곱씹어본 질문. 대답은 아니다였다. 아, 있었다. 내 인생의 히어로.


 2015년 11월 1일, 5125 x 1925mm, 간이 이동 침대 하나, 그 옆에 사람이 두 명 앉으면 가득 차는 작은 공간.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나는 히어로를 보았다. 따뜻한 말도, 많은 설명도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그는 그렇게 간이침대 위에 맥없이 누워있는 내 가족의 생명을 조용히 지켜주었다.


 7살 때 친구를 따라서 간 옆 단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나는 히어로를 보았다. 같이 놀던 친구가 집으로 가버리자 그저 친구 뒤만 졸졸 쫓아왔던 나에게 낯선 놀이터는 그저 집에서 너무 먼 사하라 사막 같은 곳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몰라 순간 당황해서 울고 있던 나를 “우리 강아지 왜 우나”하며 집으로 데려다 주신 동네 할머니. 그 후로도 마주칠 때마다 “우리 강아지” 하시며 친손주처럼 허리춤에서 체온이 베인 눅진한 사탕을 하나 꺼내 주시던 분옥 할머니. 나는 할머니 두 분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분옥 할머니가 주시는 사탕에서 어렴풋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잃어버린 집과 할머니의 사랑을 찾아주셨다.


 그냥 유난히 되는 일이 없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평소대로 시간에 맞춰 제대로 나왔는데, 그 날따라 버스가 일찍 와서 버스를 놓치고, 결국 지각을 해서 눈치가 보이고, 어제 판 주식이 오늘 갑자기 생긴 변수에 주가가 오르고, 신중히 고른 점심 메뉴가 맛이 없고, 지치고 지친 퇴근길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에서 떠밀리듯 내리다가 손에 든 핸드폰이 떨어져 액정이 나가는 그런 날이었다. 버티고 버티다가 나도 모르게 비죽 터져 나오는 서러움을 애꿎은 하늘만 쳐다보며 달래는 날.


 그래도 나이가 삼십 줄인 사람이 슬프고 서러워서 길거리에서 엉엉 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서 밀린 메시지를 읽다가 깨져버린 휴대폰 액정에서 나는 히어로를 보았다. ‘오늘 정말 되는 일이 없다’는 나의 메시지에 친구가 ‘오늘의 마지막,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글과 함께 보내준 다디단 버블티 기프티콘에 나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나이가 삼십 줄인 사람이 길거리에서 울었버렸다. 몇 천 원에 지나지 않은 기프티콘을 받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나는 삶의 많은 순간에 히어로를 만났다. 고되고 지겨운 일터에 꾸역꾸역 오늘도 발을 내디뎌 내 할 바를 다 하고 퇴근하는 당신.  내일이 보이지 않아도 일단 살아보는 당신. 힘이 들어도 아등바등 오늘을 버텨낸 당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당신. 우울함, 불안, 질병과 장애에 맞서 살아내는 당신. 누군가에게 필요한 작은 도움을 주는 당신. 그런 당신이 나의 히어로였다.


 영화 속 히어로는 하나같이 모두 강하고 비범하지만, 일상의 히어로는 모두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 치며,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한다. 불완전하고 상처투성이의 하지만 따뜻한 이들은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가끔은 무섭고 두려워도, 불편해도 그렇게 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도 있는 손길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물방울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해 진흙뻘 같은 고난을 만나 색이 탁해지기도 하고, 너무 큰 상처를 만나 붉은색이 되기도 하지만 방울방울 모여 서로를 사랑하고, 감사를 전하며 서로를 구원한다. 평범하디 평범한 그들이 마치 필터처럼 우리를 정화한다. 진흙이 섞이고 붉어진 물방울이 맑은 물이 되도록.
나의 아픈 순간, 부끄러운 순간, 슬픈 순간, 사무치는 순간에 나를 잡아주고 이끌어주던 당신, 나의 평범하고 위대한 히어로들이 있어 여전히 나의 생은 맑고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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