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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Nov 10. 2019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이 우주, 혹은 다른 우주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나같은 것들과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모두 읽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마음 놓고 좋아해도 되는 작가라는 정세랑의 설명이 옳았음을 느낀다.


작가는 닿지 않을 것 같은 미래에서, 혹은 상상되지 않는 미래에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주의 외연을 넓혀 모두를 포용하고자 했다. 한국인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였으며, SF가 더해져 범우주적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어떤 톤으로 색칠하든 메세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이 메세지에 공감할 수 있음에 기뻤다. 계속해서 사랑하고 연대하고 이해하고 공감하자.


이 책을 읽고, 이 책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살고 싶다.


책을 산 건 지난 8월이었지만, 다 읽게 된 건 11월 10일 오늘이다. 3달이나 끌어오던 소설을 오늘 끝낼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해보자.



내 주제에 과로로 몸살입니다-라고 말하기는 조금 머쓱하지만 사실이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주말을 꼬박 앓아누웠다. 역시나 무리했다. 주중에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조금 해소되는가 하더니 역시나 몸살이 났다. 몸은 무척이나 정직하다. 12시간 뒤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야하는데. 목요일이 휴가라서 다행이다.


어떤 일들은 내가 기꺼이 마음을 다잡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어떤 일들은 마음을 다잡다가 몸이 흐트러져버린다. 아직까지 몸이 준비되지 않은 탓이다. 스트레스를 감당하려면 정신력도 필요하지만 강인한 체력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근육의 비율이 현저하게 적은 내 몸은 탈락이다. 트위터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의 갑옷은 지방, 이라는 말도 봤지만 음음. 몸의 갑옷이 없으니 근육도 만들어야한다.


회사 사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30분은 영양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슨 영양제를 먹고, 무슨 영양제를 샀고 하는 이야기들. 나는 이렇게나 많은 영양제가 세상에 있음에 감탄했고, 나의 몸에게 다소 무심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 아이허브에 들어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개인 시간'이라는 것이 80% 이상 줄어들었다. 게다가 주말에는 본가에 가야하고, 아직 학회에 가야하는 시간도 남아있다. 나는 이 속에서 나만의 시간이라고 할만한 것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런데 아프기만 하면 개인 시간이 많이 생기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 글도 아프니 쓸 수 있었다. 아프니 저녁 7시부터 씻고 고구마와 데운 우유를 먹으며 책과 유튜브를 오가다가 급기야 브런치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앓아누운 와중에도 나는 이대로 누워있기만 하다간 회사에 가지 못할 것만 같아서, 몸을 일으켜 씻고 화장을 하고 백화점에 갔다. 아티제에서 맛있는 파운드 케익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1층에서 스톤헨지 귀걸이도 껴보고, 마침 생각이 나서 손목시계 수리도 맡겼다. 다행히 선불은 아니었다. 수중에는 카드도 아닌 현금 15,000원밖에 없었다.


백화점 8층의 아티제에 가서 앉으려했지만 자리가 없었다. 주말을 맞아 백화점에 들렀다가 한 숨 돌리러 자리를 잡은 아이와 아이 부모가 가득했다. 나는 편안하고 고요한 카페에서 조용히 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책을 읽을 계획이었으나 그곳은 편안/고요/조용하지는 않았다. 주말 백화점 8층에 그런걸 기대한 내 잘못이다. 새로이 편안/고요/조용한 곳을 찾을 에너지가 없어 그냥 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카모마일 차와 자허토르테를 시키고 구석자리에 앉아 반쯤 남은 김초엽을 읽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민은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던 은하가 마침내 지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관내분실> 중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에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감정의 물성> 중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셔도 소용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나는 눈물이 살짝 고일만큼(흐르지는 않는다) 슬프지만 어슴프레하게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읽으며 기뻐졌다. SF의 세상에서 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음에 기뻤다. 영화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는 많은 배우, 제작자, 감독들이 '보고 공감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 넓은 우주에서, 오지도 않은 미래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어 기뻤다.


작가는 류드밀라니, 안나니, 에밀리니 하는 외국의 이름들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윤'의 이야기로 소설집을 마무리한다. 처음에는 외국 이름들에 낯가리며 어색해하던 나에게도 뒤로 갈수록 그들의 이름보다는 그들의 이야기, 감정 같은 것들이 밀려왔다. 외로움, 사랑, 연대, 그리움, 성취 같은 느낌들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친 몸에 뿌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끝없는 밤하늘, 과학상상그리기대회에서나 상상하던 드넓은 우주에서 어렴풋이 나같은 것들에 대해 읽을 수 있어 뭉클했다. 이 우주, 혹은 다른 우주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나같은 것들과 함께 내일도 힘을 내어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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