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설경”
작성일은 1990년 1월 31일.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던 어느 겨울날이다.
메모에 남은 기록으로 보아,
그날은 하얀 눈이 세상을 넉넉히 덮었던 모양이다.
오래된 메모들을 들춰보면
글의 내용보다 먼저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시가 적힌 메모지에는 ‘상업은행’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그 글자를 보는 순간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가 함께 떠오른다.
종이 하나에도 시대가 담겨 있던 때였다.
글은 퇴고의 연속이라고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거의 고치지 않았다.
고쳐 쓰기보다는, 떠오르는 순간을 붙잡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은 작품이라기보다
감정의 흔적, 혹은 감각의 메모에 가깝다.
그런데 이 시에는 예외처럼
첨삭의 자국과 함께 작은 그림이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가 초안이고,
어디가 완성본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쓰는 순간이 전부였고,
그 이후는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메모 속 그림은 붓펜으로 그려져 있고,
눈은 수정펜으로 찍듯 표현되어 있다.
지금처럼 매끈한 도구가 아니라,
조금은 투박하고 손맛이 남는 필기구들이다.
그 위에 낙관을 흉내 내듯
어릴 적 집에서 불리던 이름까지 적어 두었다.
감성이 한껏 올라온 날이었음이 분명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시절의 감성이 특별히 풍부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감성을 끌어올려 주던
도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화이트로 눈을 표현해 보겠다는 발상,
붓펜으로 선을 긋고 종이의 여백을 느끼던 시간.
손에 쥔 도구 하나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감정의 밀도를 바꿔 놓던 때가 분명 있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쉽게 쓰고,
쉽게 지우고,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만큼 감정이 머무를 틈은
조금 줄어든 것은 아닐까.
때로는
글을 잘 쓰는 것보다,
어떤 도구로 쓰고 있는지가
감성을 먼저 만들기도 한다.
이 오래된 메모 한 장이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설경
하이얀 웃음이
하늘에서 땅으로
참새와 까치와 나무에서 나무로
녹색 옷을
벗은
마른가지에게는 솜 옷.
지붕 위에도
주춧돌 짚신 옆에도
칠수와 멍멍이가 달려간 길을
따라 지워버리는
얄미운
그러나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
그래도 너는 창밖의 하이얀 웃음
작성일은 1990년 1월 31일.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던 어느 겨울날이다.
메모에 남은 기록으로 보아,
그날은 하얀 눈이 세상을 넉넉히 덮었던 모양이다.
오래된 메모들을 들춰보면
글의 내용보다 먼저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시가 적힌 메모지에는 ‘상업은행’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그 글자를 보는 순간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가 함께 떠오른다.
종이 하나에도 시대가 담겨 있던 때였다.
글은 퇴고의 연속이라고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거의 고치지 않았다.
고쳐 쓰기보다는, 떠오르는 순간을 붙잡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은 작품이라기보다
감정의 흔적, 혹은 감각의 메모에 가깝다.
그런데 이 시에는 예외처럼
첨삭의 자국과 함께 작은 그림이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가 초안이고,
어디가 완성본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쓰는 순간이 전부였고,
그 이후는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메모 속 그림은 붓펜으로 그려져 있고,
눈은 수정펜으로 찍듯 표현되어 있다.
지금처럼 매끈한 도구가 아니라,
조금은 투박하고 손맛이 남는 필기구들이다.
그 위에 낙관을 흉내 내듯
어릴 적 집에서 불리던 이름까지 적어 두었다.
감성이 한껏 올라온 날이었음이 분명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시절의 감성이 특별히 풍부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감성을 끌어올려 주던
도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화이트로 눈을 표현해 보겠다는 발상,
붓펜으로 선을 긋고 종이의 여백을 느끼던 시간.
손에 쥔 도구 하나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감정의 밀도를 바꿔 놓던 때가 분명 있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쉽게 쓰고,
쉽게 지우고,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만큼 감정이 머무를 틈은
조금 줄어든 것은 아닐까.
때로는
글을 잘 쓰는 것보다,
어떤 도구로 쓰고 있는지가
감성을 먼저 만들기도 한다.
이 오래된 메모 한 장이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