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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모 Nov 03. 2021

보상

하루하루

- 동료 : 니모님은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게 많으세요?


연달아 이어진 두 건의 회의를 처리하고, 슬슬 내 업무로 돌아가 디자인하려는 인쇄물의 실물 크기와 비슷해 보이는 책장 앞에서 줄자를 들고 길이를 재고 있을 때였다.


- 나 : 네? 제가 무엇을 알고 있었나요?.. 하하 아는 게 없는데...

- 동료 : 이게 바로 짬인가?


예상치 못한 기습 문제(정답이 필요할 것 같아 질문이 아니라 기출문제 받은 기분이었다)에 고장 난 사람처럼 대답했다. 한 번도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도 안 했던 부분이고, 혹시 말 잘못하면 건방져 보이는 건 아닐까에 대한 내면의 답안들이 마구마구 충돌했다.


- 동료 : 하시는 분야 아니라도 다 아시잖아요. 신기해요.

- 나 : 하하하 그런가요?.. 그냥 그것만 아는 걸 거예요.


뒷말은 제대로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는 게 많아 보이고 싶던 시절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인데, 오히려 아는 게 없음을 인정하자 종종 듣는 말. '그런 건 어떻게 아세요?', '니모님한테 물어보면 해결해줄걸요?' 등등.


아는 건 적은데 그것들을 뉴런들이 열심히 연결 지어 이야기하다 보니 아는 게 많아 보였나 싶기도 하다. 혹은 프로그래머 생활할 때 이빨을 잘 까서 지금도 그냥 이빨만 까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알고 말하는 게 아니고 경험에 의한 추측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예상되는 부분을 말하기도 한다.


길이 측정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아까 당황해서 생각지 못한 부분들을 찬찬히 끄집어내니, 비슷한 시간을 살았는데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거나) 더 많은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주어진 나의 시간을 충실히 살았다는 증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감격스러웠다. 하하.


내가 쌓아온 시간들을 부정당하는 것만큼 슬픈 상처도 없는데, 오늘은 내가 쌓아온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동료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기뻤다. 아는 게 많아 보인다는 말 때문이 아닌 내가 쌓아온 시간들에 대한 자각을 보상으로 받은 것 같아 기뻤다.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부단히 시도하고 부딪히고 깨지고 하다 보니 시야도 넓어지고 경험치가 꽤 쌓였나 보다. 재밌게 잘 살았다는 가벼운 칭찬 정도.


하루하루 재밌게 살았더니, 그리고 오늘 하루도 재밌었네. 사는 게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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