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베짱이가 결성되기 전, 클라이언트로부터 포스터를 의뢰받아 만들어 드린 일이 있었다. 다행히 포스터 작업은 어렵지 않았고 클라이언트로부터 굉장히 만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의 일의 연장으로 이번에 일하는베짱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인 영상제작 의뢰를 주셨다.(얏호!)
회사를 다녔던 시절부터 꽤 많은 작업을 함께했던 클라이언트였다.
오히려 우리의 첫 손님으로 맞이하기에 그분들이라 다행이었고, 일의 규모도 (비교적) 소규모라 적극적으로 업무를 받아들였다.
베짱이들은 디자이너다. 여기서부터 난관이 생겼다. "기획"에 대한 부재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에헴) 마케팅팀에서 마케팅 담당자보다 마케팅을 잘 이해한 디자이너
기획자보다 더 날뛰는 기획력을 갖춘 디자이너라는 평을 받은 적이 있었다.
뭔가 명확히 전문적인 것 없이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 살짝 발을 담그고 있는 나는 이것이 나의 고민 중의 하나였는데, 최근 읽은 책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몸값을 낮추는 사람이라고(이런 뜻이었던 거 같은데) 이야기해서 위로를 받았다. 사업에는 더 유리하다고.
여하튼 나는 기획자들만큼은 아니지만 "기획도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다. 매사에 보통 나는 이런 편이다.
"할 수 있다."의 마음이 기저에 늘 깔려있다. 기획일을 만만히 여겨서는 절대 아니다 저 "할 수 있다"에는 "잘"이라는 부사가 빠져있다. 그래서 그냥 하자고 생각했고, 그렇게 받아 든 클라이언트의 스토리보드는 내 눈에는 따로 기획이 필요 없다고 판단할 만큼 잘 정리되어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오류는 잘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단지 잘 정리되어있다는 점 하나로 기획을 다시 하지 않았다. 그저 정리된 내용을 더 보기 좋게 편집하는 정도로 기획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혹시나 해서 또 이사님을 만나 뵙고, 기획에 대한 문의를 드렸다. 기획서와 콘셉트 시안 전달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사님은 정리된 기획서에서 끝나지 않고 아이디어를 곁들여 주셨다. 5분 분량의 두 편이 되는 영상에 대한 기획안을 우리는 그날 오후 5시부터 새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스토리보드를 정리한 기획안과 우리식으로 재구성한 기획안, 이렇게 2종을 전달하기로 마음먹고
우리는 그날 밤 10시 넘어서까지 스토리보드 정리 기획안을 더 치밀하게 정리하고 조리했다. 같은 문구와 대사를 읽고 또 읽고 문장을 고치고 다시 바꾸고.
우리식으로 재구성한 기획안은 각자 1편씩 집에서 작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오전 9시 반까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우리식으로 재구성한 기획안을 함께 보며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내레이션이 전체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메인 캐릭터 1명에게만 들어가기로 해서 어색하지 않게 영상을 끌어갈 수 있게 기획서를 쓰는데 꽤나 까다로웠고 새벽 3~4시경까지 기획서를 작성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반, 우리는 헤롱 거리며 만나서 또 기획서를 10번 넘게 소리 내어 읽어가며 수정을 시작했다. 기획서 작성을 끝내고 나니 참 뿌듯했고, 그 과정도 육체피로만 아니면 상당히 즐거웠다. 같이 할 수 있는 동료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한다.
꽤 오랜 시간 기획에 대한 피드백은 받을 수 없었는데, 그들의 내부 사정이 있었던 듯했고
기획서는 한 번만에 통과되었다. 이렇게 한 번의 허들을 뛰어넘은 것 같아서 우리가 대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