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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글쟁 Oct 19. 2020

애매한 사람

요즘 문득 나의 자리를 생각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나'라는 사람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청소년기 때보다 더 고민스럽고 애매하다. 청소년일 때는 적어도 별 일이 없으면 '학생'이라는 직업을 당연하게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 연구원, 기획자 내지는 회사원이라 허울이 분명하게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치환시키곤 한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는 세상에 애매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며느리. 이 외에 또 다른 말로 나를 치환시키기가 어렵다. 물론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오랫동안 직업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의 정체된 단편이라고나 할까.


코로나 19와 반복되는 육아 일상으로 한 없이 정체된 느낌을 받는 어느 날,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전에 한 번 떨어진 브런치 작가 등록에 재도전했고, 금방 작가 등록이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살짝 들뜬 마음으로 브런치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다. 텅 빈 프로필을 채워달라는 알림이 눈에 띄었다. 이런저런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몇 줄을 적어 넣고 나니, 다음에는  수많은 직업들 중에 몇 가지를 선택하는 페이지가 나타났다.


CEO, 가수, 간호사, 강사, 강연자, 개발자, 공무원, 기획자, 마케터... 눈이 아른거리게 잔뜩 떠있는 직업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선택하지 못했다. 이전의 직업을 선택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딱 들어맞는 직업도 없었다. 억지로 빌붙어 보려고 프리랜서나 크리에이터를 선택할까 싶었지만 그것도 사실은 내키지 않았다.


'아, 참 애매한 사람이구나.'

CEO보다, 변호사보다, 가수보다 전업주부가 우리나라에는 더 많을 텐데. 그 비슷한 직업은 없었다. 약간의 서운함과 답답함이 마음에 스며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싶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나의 직업은 없었다.


그런 애매함은 사실 이전부터 느꼈다. 다시 학생으로 연구자로 기획자로 자리 잡기에는 어린아이들이 내 손을 필요로 하고, 육아를 하는 것보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수준의 급여를 주는 자리를 찾기도 어렵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나의 욕망을 매 순간 누른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런 시답잖은 고민들 속에서 찾은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 말이다. 남들이 보면 팔자 좋은 고민이라 수군댈 이야기지만 뭐 그렇다. 애매한 사람. 그 애매함 속에서 또 다른 에너지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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