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글쟁 Dec 03. 2020

헬스장에서는 신나는 음악 금지

절간보다 더 고즈넉한 어느 헬스장 이야기

그 날부터 그의 곱게 빗어 넘겨 묶은 희끗한 머리 꽁지가 싫어졌다. 마치 그의 고지식함과 독단을 백발의 머리 꽁지로 상징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와의 마찰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동네 헬스장을 좋아했다. 주민자치회에서 운영해서 동네마다 있을뿐더러 세 달에 5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까지. 이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었고 웬만한 기구들도 갖추어져 있어서 혼자 운동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아침에 분주하게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혀 등원시키고 나면 나는 언제나 동네 헬스장으로 향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가니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운동하는 멤버들도 비슷했다. 60대 할머니지만 근력 운동계의 숨은 고수로 통하는 어르신 한 분(고수), 운동을 막 시작해서 고수 할머니에게 운동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40대 주부 두 명(언니들), 한 퇴직한 부부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퇴직 부부), 주야장천 러닝머신만 달리는 아저씨(아저씨), 반 백발을 곱게 묶은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나.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이 헬스장은 유난히 고요했다. 조용함을 넘어서서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누구라도 와서 혼내기라도 한 듯한 그런 고요함 말이다. 물론 여느 헬스장답게 신나는 음악을 재생시켜줄 오디오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무슨 절간 같은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어서 좀 의아했다.

매일 얼굴을 보고 땀 흘리며 운동을 했던 고수와 주부 언니들은 꽤나 친해졌다. 내가 제일 젊은 나이여서 기계를 잘 만질 거라 생각했던지 어느 날부터 주부 언니들이 오디오를 켜보라고 부추겼다. 너무 조용한 것보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운동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언니들은 자녀들에게 시켜 USB에 음원을 담아오는 노력까지 보였다. 나는 다수의 의견에 힘 입어 오디오 볼륨을 최소한으로 켜고 언니들의 바람을 실행해주었다.


역시 운동할 때는 신나는 음악이 있어야 된다며 즐겁게 운동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느 날처럼 헬스장에 들어서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오디오를 켰고 모두 각자의 운동에 열심이었다. 여럿이 같이 이용하는 시설이라 비트감이 느껴질 만큼 음량을 높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절간 같을 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굳은 표정의 꽁지머리 어르신이 음량을 아예 들리지 않게 줄여버린 것이었다.


"음악소리가 너무 크셨어요? 며칠 동안 계속 틀었는데 시끄러우셨으면 말씀을 해주시지요."

나는 예의를 갖춰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이거 시끄러워서 텔레비전을 볼 수가 있어야지! 여기가 음악 듣는 데냐고! 음악 들으려면 집에 가서 듣지 왜 여기서 듣고 난리야!"(정말 음량 최소한으로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작게 켜놓았음)

그러면서 꽁지 버리 할아버지는 아예 안 들리게 음량을 0으로 낮춰버렸다.


늘 이어폰을 꽂고 텔레비전을 봐서 괜찮다 싶었더니, 헬스장이 절간 같다가 어쩌다 작은 음악 소리가 들리니 어지간히 거슬렸나 보다. 할아버지가 음악 소리를 거슬려하는 만큼 나 또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상당히 거슬렸다. 충분 공손하게 말씀드렸는데 헬스장에서 음악 틀었다고 이렇게 화를 내고 혼낼 일인가 싶어서 말이다. 죄송하지만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꺼냈다.


"미리 불편하다 말씀해주셨으면 오디오를 끄던지 했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음악을 끄다시피 하면 어쩌시나요. 그리고 헬스장에서 음악 들으면서 운동하는 일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요. 오히려 텔레비전을 집에서 조용히 보시는 게 좋지 않나요. 여기가 운동하는 곳이니 텔레비전 보는 곳은 아니니까요."

"음악은 집에 가서 들으라고! 여긴 다른 헬스장 하고 달라!"


텔레비전 시청을 집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내 말에 꽁지머리 어르신은 더 큰 목소리로 응수했지만 별 할 말이 없었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무셨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는 중에 오디오를 켜라고 부추긴 주부 언니들은 한 마디도 거들어주지 않았고, 매일 할아버지 옆에서 같이 이어폰을 꽂고 러닝머신을 걷던 아저씨는 '그동안 너무 시끄러웠다'며 할아버지 편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나만 좀 되바라진 새댁이 되어버렸다. 언니들은 이후 꽁지머리 할아버지가 안 보일 때를 틈타 할아버지의 흉을 봤다.


이 사건 후, 우리들은 다시 절간 같은 헬스장에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요하게 운동해야만 했다. 고요함의 깊이만큼 나의 생각도 많아졌다. 만장일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한 신나는 음악을 켠 것이 그렇게 역정을 낼 만큼의 일인지. 어르신은 왜 꼭 절간 같은 헬스장을 원하는 건지. 본인이 조용한 것을 선호한다고 해서 다수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그것을 따라야만 하는지. 러닝머신 아저씨는 한 마디 내색도 안 하다가 할아버지 편을 든 건지, 주부 언니들은 자기들이 부추겨 놓고 왜 한마디도 안보 태준 건지. 한편으로는 왜냐고 자꾸 물으면 뭐하나 싶으면서 뭐 어쨌거나 사람 앞가림은 자기가 하는 거니 다들 어쩔 수 없었겠지 싶었다. 내가 별난 걸지도 모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절간 보다 더 고요한 헬스장에서 각자의 땀방울을 흘렸다. 나는 귓구멍에 이어폰을 꼭꼭 끼고, 그 어르신은 반 백발의 꽁지머리를 달랑거리면서. 누가 헬스장 문 앞에다 크게 써붙였으면 좋겠다. '헬스장에서 신나는 음악 금지'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큰 상장을 받은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