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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글쟁 Dec 07. 2020

엄마가 화투 치는 게 싫었다

엄마가 내 나이 때 치던 화투의 의미

일이 있어 김장하기 힘든 작은 아버지네 김장까지 혼자서 다 할 거라는 엄마가 괜히 신경 쓰이는 아침이었다. 월요일에 김장을 한다고 했는데. 나에게 한 번도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는 엄마였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러지 말고 친정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고기 몇 근을 사들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동생까지 데리고 시골 친정집으로 향했다. 그 사이 작은 어머니가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해 잠시 짬을 내어 엄마와 김장을 모두 끝낸 뒤였다.


잠시 시간을 보낸 뒤에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코 끝에 김치 양념 냄새가 스쳤다. 엄마에게 잔뜩 배긴 냄새였기에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방금 만나고 온 폭삭 늙어버린 엄마 말고 엄마가 나를 키우던 젊은 날의 엄마 말이다.


엄마는 타고난 손재주가 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지역에서 하나뿐인 횟집을 했었다. 엄마는 횟집을 하면서도 틈틈이 서예학원에 나가 서예를 썼다. 어린 기억에도 엄마는 몇 번이나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장손을 키우는 데 집중하지 않고 장사를 하는 엄마를 늘 마뜩잖아했던 할아버지의 성화에 엄마는 성황이던 횟집 문을 닫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엄마가 전업주부가 되는 동시에 우리는 새로 지은 주공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오빠와 나는 다니던 학교에서 집이 멀어졌지만 전학하지 않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4교시를 마치고 집에 오면 나를 맞아주는 건 엄마가 아니라 '몇 호로 오라'는 쪽지였다. 나는 그 쪽지가 꽂힌 날이면 짜증이 났다. 아빠가 출근하고 우리가 등교한 사이, 엄마는 같은 동의 친한 아줌마들끼리 모임을 가졌다. 휴대전화가 없던 때였으니 현관문 사이에 쪽지를 꽂아두고 열쇠를 가지러 오라는 뜻이었다. 어쩌다가 401호나 505호로 오라는 쪽지를 받는 날이면 더욱 짜증이 났다. 버스정거장에서 아파트까지 오르막을 올라온 것도 지치는데 다시 계단을 더 걸어야 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신경 쓰이는 일은 따로 있었다.


엄마는 또래 아줌마들과 모여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십 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박이라고 하기는 뭐한 심심풀이 게임이었지만, 어린 딸의 눈으로 보기에는 보고 싶지 않은 현장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401호에 가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열쇠를 받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에게 제발 화투 좀 안치면 안 되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 말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늘 왜 하필 그때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지금 내 나이 때의 엄마를 떠올려보니 그 생각이 났다.

'엄마도 참 답답하고 심심했겠다.'

지금처럼 여성들이 어디 가서 무엇이든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취미를 가지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어리고 남편은 일하느라 바쁘고 엄마도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또래에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의 아줌마들이 모여서 수다 떠는 게 낙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엄마도 당연히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텐데.

변명하자면 그때의 나는 화투를 치는 행위 뒤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긴 그 의미를 알게 된 것도 내가 아이를 낳은 뒤였으니 그때는 알 턱이 있나.


엄마는 우리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식당을 해야만 했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질만 남은 아빠에 굶어 죽어도 뒷바라지해줘야 하는 장손인 오빠, 말이라고는 안 듣는 나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환갑이 훌쩍 넘은 우리 엄마는 지금도 일을 한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의 손재주로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안동포 주 생산지에 살며 안동포 공방을 만들어 공예품을 만들고, 얼마 전부터는 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 전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엄마가 하는 일을 늘 보고 있으니 큰 감흥이 없지만 크고 작은 상들을 숱하게 받았다. 늘 도와주지는 않고 입만 살아서 잔소리만 하는 딸이지만 엄마의 손재주가, 엄마의 근성이 대단하다 싶다. 수 십 년간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참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만 했으니 그 속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내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이라도, 이제서라도 엄마가 하고 싶은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김치 양념 냄새와 엄마가 치던 붉은 화투가 생각나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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