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 참 많이도 받아 보았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그 순간에도,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과 마주했던 기억이 난다. 비단 로스쿨 입학 원서가 아니더라도, 어느 것이든 소위 ‘자소서’는 작성하기 퍽 어려운 글이 아닐까. 속마음을 위악적으로 털어놓았다가는 탈락하기 십상이고, 나 자신을 누가 보아도 꽤 괜찮은 사람처럼 써넣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 자랑만 늘어놓을 수도 없으니까.
로스쿨 입시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꼭 로스쿨 입학 후 학업 및 장래 계획을 묻는 문항과 마주하게 되는데, 내가 쓴 자기소개서의 경우에는 그 질문이 ‘4번 문항’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로스쿨 재학생이나 변호사에게서는 종종 묻지 않아도 그들의 ‘4번 문항’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는 한다. 그렇게 흘러나온 '4번 문항’에는 우리나라에서 그 분야로는 손에 꼽힌다는 유명한 로펌의 변호사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전설적인 인권 변호사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며, 대법관이 튀어나오거나, 혹은 어느 특정 인물의 이름이 나올 수 없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포부가 들어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4번 문항’들은 훌륭히 달성되어가는 중인 경우도 많지만, 개중에는 바뀐 것도 있고, 부득이 버려진 것도 있으며, 개중에 몇은 그만 잊혀 버리기도 한다. 혹은 어느 변호사는 그 ‘4번 문항’을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마음속에 그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기도 하며,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변호사는 이루지 못한 그 ‘4번 문항’을 부끄럽게 여겨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목은 ‘천재와 싸워 이기는 법’이라고 거창하게 적어 놓고 웬 구질구질한 응석이냐 싶지만, 적어도 천재와 자신을 견주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이 구질구질할 리 없다. 그는 분명 뜻을 높게 두고 힘을 쏟아 본 일이 있는 사람 일게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쏟은 분야에서 추월이 불가능한 듯한 어떤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그런 사람에게 분명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일전에 나는 그 ‘천재’와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바로 만화가 이현세 선생님이 2005년 2월 22일 서울신문에 기고한 “해 지기 전에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50223030004)"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살다 보면 꼭 한 번은 재수가 좋든지 나쁘든지 천재를 만나게 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꼭 모든 것이 처음인 어리바리 신입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아마 누구나 살다가 한 번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 그와 비교하고, 나는 왜 느릴까, 나는 왜 부족할까 조바심을 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들을 ‘천재’로 치환하여 위 글을 읽어 내려갔다
위 글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사실 천재를 이기는 방법은 정공법이 아니라는 것. 정면으로 대들었다가는 만신창이가 되어 주눅 들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구태여 나를 상처 입힐 필요가 없다. 천재는 한 10년에서 20년쯤 먼저 가라고 해 놓고, 나는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된다. 산다는 것은 근 한 세기에 걸쳐해야 하는 장거리 승부이며, 앞서 간 천재는 한 걸음을 내딛는 나에게 갈 길이 되고, 높은 뜻이 되어 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4번 문항’에 장래 포부를 쓰던 그때처럼.
여기까지 써 놓고 때 늦은 고백을 하자면,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내 취향은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성공한 이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친다"는 쪽에 가깝다. 이 글을 쓴 사람이 한국 만화계의 손꼽히는 천재인 이현세 선생님이라는 점도 이렇게 마음을 먹고 보면 한없이 삐딱하게만 보이고, 결국 천재한테는 안되니까 니 할 일이나 잘하라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오른다. 사실 그 말도 맞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된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뜻을 높이 세우고 힘을 쏟다가 천재를 마주한 사람에게는 결국 자신이 가진 그 '애매한 재능'에 절망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던 길을 향해 계속해서 한 걸음을 걸어내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되니까.
이 “해 지기 전에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이라는 글은 제목 그대로 해 지기 전에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나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하지만, 저마다의 ‘4번 문항’ 속 그 모습, 만나게 될지 어쩔지는 아무도 모를 일. 다만, 우리 모두 덜 주눅이 들고, 덜 상처 입으면서, 오늘도 딱 한 걸음씩만 더 걸어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