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미룹니다.

by 유진

나는 항상 미룹니다.

잠자려고 누운 침대 속

내가 미처 눈감고 지나가버린 일들이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며칠 뒤에 완성해야 하는 과제들

스포일러를 혐오하는 나도

이번만큼은 스포 당하고 싶은

두꺼운 책 속 숙제의 정답들

그리고 언젠가는 신나게 썼었던

다 못 마친 글까지도요.


그 미처 끝내지 못한 것들이

쿰쿰하고 답답한 열기를 뿜어냅니다.

정말 시원하게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자려던 나는

그 해치우지 못한 끈적하게 달라붙은 열기에

잠시 숨이 막힙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눈 딱 한 번 감고 지금 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다 끝내는 모습을요


하지만 결심하려고 닫은 눈꺼풀은

이내 다시 제 결심을 열지 못하게 점차 무거워집니다.

서서히

나는 무거운 눈꺼풀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데

내일 잘 부탁한다는

텅 비어버린 말을 외칩니다.

지금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힘이 없다고

지금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를 파란색 베개와 깊게 빠질듯한 까만 이불로 가둬버렸다는

아무도 못 들을 구조신호를 보낸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문에서 자그마치 십리 정도 벗어난 나는

점점 열기와도 멀어지고 가벼움과 홀가분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바로 구속 없는 자유

행복은 자고로

멀리 있지 않아

결국 가까운 곳에 있어


그러다 잠시 저 쪽에 조그마한 빛이 새어 들어와

문을 열어보는데


쏟아지는 빛 때문에 더욱 후끈해진 열기로 가득한

아침햇살에 절망한 나는

일어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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