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때 부터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는데 노력해도 소질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피아노를 배우며 알게 되었다. 깐깐하고 신경질적이었던 피아노 선생님은 나랑 같은 본가였는데
"우리 김씨 중에 너 만큼 피아노 못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라며 혀를 차셨다. 30년도 넘은 일인데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는 지금도 기억난다. 숙제도 꼬박꼬박 해가고 참 열심히 피아노를 쳤던 시절인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안타깝다.
체르니 100번을 두 번 반복해서 치고 체르니 30번도 반복했었다. 혼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피아노를 못치게 되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아 초등학교 졸업하기 직전까지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가까스로 체르니 40번을 중간정도 쳤을 때 그만 뒀다.
체르니 100번을 치며 양손 연주가 가까스로 가능해졌을 때 아빠가 '을지악보'에서 파는 <잊혀진 계절>의 악보를 사오셨다. 400원이었다. 그걸 연습해서 쳐보라고 하셨다. 지금도 기억난다. 미파솔~ 미레도 시도라시솔~.
텔레비전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이름과 얼굴이 표지에 인쇄되어 있었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아빠의 명령이고 부탁이니 연습을 안 할 수가 없어 매일 한 두번 씩은 쳤었는데, <잊혀진 계절>을 칠 때마다 엄마는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었다. 다 카더라이야기일테니 여기에 다 쓸 순 없지만 열 살이 안된 그때의 나로서는 남자가 유명해지면 왜 다른 생각을 하는지, 한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자는 왜 불행해 지는건지, 그땐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잘은 모른다. 내 남편은 유명하지 않았고 나는 순정까지는...
그래서인지 매년 10월이 되면 한 달 내내 저 노래가 입가에 머물고 피아노를 다시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왜 조성진의 손가락은 피아노치는 손가락이고 내 손가락은 설거지나 하는 손가락인가 싶어 우울질이 올라올 때면 유튜브에 피아노 전공자들이 피아니스트에게 레슨받는 영상을 보며 우울을 떨치곤 했다. 저렇게 잘 쳐도 깨지는데, 설거지라도 할 수 있는 내 손가락이 귀한 손가락이다 하며 셀프 위로했다.
매년 특별한 기억과 함께 시작했던 10월, 올해는 추석으로 시작했고 코로나도 함께 했다. 고향방문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다들 경기도 외곽으로 좌천해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추석 때 받은 용돈으로 뭐 하나라도 사기 위해 내가 마트에 갈 때마다 따라 나섰다.
다이소 물건은 다이소 정도로서의 기능을 한다. 아이들도 그걸 알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장난감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돈은 통장에 넣기로 하고 사고 싶을 때 편하게 쓰기로 한 만원 가지고 이거 살까 저거 살까 하며 셈하고 머리 굴리는 아이들이 귀엽다.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초기보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당부가 더 커지기도 했지만 아이들 스스로도 외출 필수품이 마스크라고 생각한다. 여름까지만 해도 '실외에선 괜찮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놀이터에 사람이 없으면 나는 아이들에게 답답하면 마스크 빼도 된다고 말해주는데 "마스크를 써야 안전하다"며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쓰고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3월 부터 부지런히 우리 집 베란다에 심었던 방울토마토는 6월 즈음 열매를 많이 주더니 나름 2모작을 하는지 10월에도 열매를 맺고 있다. 서늘해진 날씨때문인지 잎사귀가 마르거나 노래지는데 위에서는 저렇게 탱글탱글하게 맺히는 열매들을 보면 난치병 있으신 분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것 처럼 뭔가 생명의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식물의 의지랄까.
마지막으로 가면서도 애절하게 열매를 맺고 열매가 익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애잔한거다.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마른 잎과 마른 가지 꺾어주고 물 주는 것 뿐인데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신다는 성경말씀도 생각나고,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도 생각나고.
이 순간에도 방울토마토는 자라고 있다.
눈물겹고 안쓰럽다.
그런데 맛있어서 웃는다.
(주는 건 물 뿐인데 왜 이리 단 건지 모르겠다)
식물이란...
생명이란...
단 한 순간도 불태운 적이 없는 내 인생이 안쓰럽다.
생명의 신비 또 하나.
우리 아파트 단지에 감나무가 많이 있다. 지난 주 초엔 정말 색깔도 예쁘게 익어서 저 감들 바람이라도 불어서 주차된 차 위로 떨어지면 어떡하지 싶기도 하고 얘네는 야생으로 바람과 비만 맞으며 사는데 울창하게 잘도 크니 누구 도움 없인 못 사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금요일에 아들 등원시키려고 나가니 경비선생님들께서 감을 따고 계셨다.
"우와! 감이다!"
하는 아들을 보시고
"감 먹어요. 맛있어, 이거."
하셔서 나도 아들도 하나씩 들고 갔다.
마트에서 파는 감만 봤지 나무에서 직접 딴 감은 나도 아들도 처음인지라 어린이집에 가는 내내 아들은 아저씨들은 그 높은 나무 위에 어떻게 올라가신 건지, 내년에도 또 먹을 수 있는지, 그동안 비밀이었는데 자긴 감을 정말 좋아한다고, 할머니께 감을 꼭 보여드리자고 이야기하며 신나했다. 그 날 오후에 퇴근하고 들어오니 1층 집들 현관에 검은 봉지들이 걸려 있길래 '저거 뭘까?' 했는데 우리 집 현관에도 걸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보니 감이 2개 들어 있었다. 세대별로 두 개씩 주셨나보다.
따시는 것 만으로도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나누어 주시기까지. 마침 집에 계셨던 친정엄마랑 감을 깎아 먹었는데 정말 달고 맛있었다. 그동안 아파트 관리에 불만이 많았는데 감 두개에 마음이 확 녹았다. 나의 마음은 참 갈대같다.
가을은 역시 한국의 가을이지, 싶게 색깔의 파노라마는 "미쳤다"라는 말만 튀어나오게 하고.
하늘을 보면, 색깔들을 보면, 도무지 코로나를 상상할 수가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많이 일어나왔으니 이 또한 안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버티며 살아야지 싶기도 하다.
주 1회 등교를 했던 첫째 아이는 10월 셋째 주부터 주 4회 등교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식사 시간 빼고는 마스크를 쓰고 친구들과 잡고 뛰고 뒹굴며 놀 수 없는데도 "학교가 너무 재밌어."라고 한다. 주 1회 하는 '팀즈' 온라인 미팅도 자기가 어플키고 들어가서 음소거하고 입장하고 비디오 켜고 음소거 끄고 대답하는 모든 과정을 그저 '감'으로 해내는 모습을 보며(내가 옆에 있긴 했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을 통과한 나 보다도 첨단에서 더 첨단으로 가는 딸이 더 역동적인 역사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덕분에 가지가지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주식과 부동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퍼스널 브랜딩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돈 안되는 글쓰기가 좋아서 그냥 이러고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언어치료실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친구들의 일정에 변동이 많다 보니 문제 행동이 더 심해지기도 하고 컨디션의 기복도 커지고 퇴행을 보이는 친구들도 일부 있어서 치료사도 치료사들이지만 부모님과 활동보조 선생님들의 노고가 엄청난 시기이다. 이 모든 분들의 노고와 노력이 위안받을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구정이 있던 1월 부터 코로나를 이야기했으니 계절상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이런 한 해가 있구나. 상상도 생각도 못했던 일은 현실 속에 우리를 갈아 넣었다.
때때로 웃었고 대부분 무표정했다.
적당히 불행하고 어떤 순간 행복했다.
전반적으로 우울했고 가끔 신났었다.
생각해보면, 올해가 아닌 다른 해라고 해서 늘 신나고 가끔 우울했거나 적당히 행복하고 어느 순간만 불행하진 않았던 것 같다. 늘 비슷한 수준의 우울과 행복, 불행과 신남이 있었다.
<잊혀진 계절>을 치라고 했던 아빠는 1950년 생이시다. 전쟁통에도 아기는 태어난다더니 그 전쟁통에 태어난 아기가 우리 아빠다.
어느 시절이나 우여곡절이 있다. 우여곡절을 타고 희노애락이 온다. 적당한 불행과 찰나의 행복이 필요한 시점에 잘 나타나 주어 시절을 기억하는 그림이 적절하게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