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직장의 직원분이 다음주 근무를 끝으로 퇴사한다고 하셨다. 치료팀의 중요한 일들 뿐 아니라 궂은 일들까지 수습해주시던 행정선생님이다. 함께 일한 지 한 3년 정도 된 것 같다. 각종 서류는 물론 물품과 대기자들 관리, 어머님들의 민원과 비용처리, 제일 중요한 치료사들 급여까지 관리해주신다.
나는 복지관이 개관한 다음 해에 입사해서 10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 여기 근무하는 세월중에 가장 평탄했던 3년이었다. 장애인 관련해서는 굵직한 정책이 아니라도 자잘하게 변경되는 지침들이 있고 서류의 양식이라도 조금씩 달라지곤 한다. 감사나 지도점검은 말할 것도 없이 부담백배. 그럴 때마다 빠르고 꼼꼼하게 처리해주셔서 감사했다.
개관 초기에는 그야말로 초기였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스타일로 치료사들이 행정일까지 해야해서 온갖 교통체증이 일어났었다. '개관'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실무까지 해야하다니, 체계는 없고 하라는 것은 많고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도)모르는데 하긴 해야하는 일들이어서 서로서로 난리가 났었다.
한참 고충을 겪고 난 후에 행정업무를 위해 인력을 채용하긴 했는데 청년인턴이라 서로 적응할 만한 3~6개월 정도가 되면 취업, 복학, 계약만료 등의 이유로 그만두거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그때는 치료사들이 업무방법을 알려줘야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규직원 중 야망이 있던 분이 팀장자리로 오면서 자신이 행정업무까지 다 하겠다고 했었다. 조금 특별하다고 해야하나, 편하지 않은 분이었다. 출근길에 인사를 전하며 입고 오신 원피스가 디자인도 색깔도 멋져서 인사를 건냈었다.
"오, 팀장님. 옷이 색깔도 멋지고 되게 분위기 있네요."
"이거 바자회에서 산 거 아니거든요?"
하며 휙 앞질러 가셨다. 좀 어이가 없었다.
팀장님 옆 자리에서 일하던 직원은 임신중이었는데 팀장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심해 하혈을 두 번 했었고, 그 직원의 출산휴가대체직원으로 왔던 분은 계약기간을 다 안(못) 채우고 퇴사했다. 팀장이 호기롭게 다 해낼 수 있다고 했던 행정관련 업무들은 줄줄이 구멍이 났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결국 행정업무 서포트를 위한 청년인턴을 다시 들였는데 그 청년인턴은 계약만료되기 전 날 용기있게 관장님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한 뒤 다 질러대고 계약만료되던 날은 휴가를 냈다.
덕분에 우리 팀은 인기팀으로 급부상했고, 팀장은 관장실에 불려가 된통 깨졌다는 소문이 있고, 감사 때 서류미비로 또 찍혔고, 그 화를 치료사들에게 다 질러댔고, 우리는 불통과 원통의 인간들이었고, 팀장님은 (사실 '님'이라고 쓰기도 싫은) 그 다음 감사일정이 시작되는 어느 해 3월 직전, 2월에 엿먹으라는 식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떠났다.
팀장은 몸만 떠났을 뿐 후일담이 정말 많았다(그건 다음기회에). 팀장이 나가고 나서 팀장자리는 없어졌고, 행정업무 전담직원을 채용했다. 그 분이 이번에 떠나시는 분이다. 소통이 원활했으니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할 일이 없었고, 해야하는 일과 방법, 기한을 명확하게 안내해주시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치료수업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점심시간을 따로 두지 않고 일하는 우리들을 위해 간식도 쏠쏠히 챙겨서 넣어주시고 분기에 한 번 씩 했던 회식이나 회의분위기도 숙제같지 않아 너무 좋고 편했다. 이 모든 일을 어레인지 해주시던 분이 행정선생님인데, 센스있는 안목에 감탄을 할 때도 많았다. 그랬던 그 분이 그만두신다니.
어디 아프시냐, 다른 곳으로 스카웃 되셨냐, 갑자기 왜 이러시는거냐, 결혼하시냐, 돈 많으시냐, 생계는 어쩌시려고.. 하며 웃고 있지만 사실은 울먹한 나에게
"그냥 좀 쉬려고요. 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돈도 없고 나이만 많잖아요. 그냥 쉬게요."
"쉬는 건 나도 쉬고 싶어요. 왜 지금 쉬냐고요. 덕분에 안정된 시간을 보냈는데, 아우 안돼요. 어디로 가시게요."
"집에 가요. 몰라요. 그냥 한 두달 쉬면서 생각해보게요."
"생각날 때까지 여기 있어요. 네??"
얘네처럼 나도 쉬고싶다고. 부럽다 너네팔자.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선생님이 웃으며
"진작 잘해주지 그랬어~ 코로나때메 밥도 못 먹고 섭섭해서 어떡해요?"
아, 코로나때메 밥도 못 먹는구나.
5인이상 집합금지. 걸리면 벌금내야겠지. 어우. 어떡하지.
행정선생님이 퇴사하는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둘이 밥을 먹기는 좀 부담스러운 그런 사이. 개인적인 카톡은 안해도 단톡방에선 농담도 심심찮게 할 수 있는 사이. 다같이 밥 한끼 먹으면 좋은데. 마침 새로 오신 다른 치료사선생님들도 계시니 인사도 하고 통성명도 할 겸 식사 아니, 차라도 하면 좋은데 코로나 때문에.
그렇다고 일일이 심방다니며 내가 김호정이고, 저 교실쓰는 언어치료사라고 소개할 만큼 사교적이거나 무슨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모이라고 하면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밥 먹고 그냥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적당히 어색하고 적당히 애매하게 관계를 이어가는 그런 사람들은 대개 5인 이상인데.
애매한 사람들은 이럴 때 더 멀어질까, 가까워질까?
친했던 사람들도 멀어지는 마당에 가까워질리 만무하겠지만 애매한 관계라고 해서,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까진 없다고 해서 '정리할 관계'가 되는건 아니지않나. 어쨌든 출근하면 얼굴을 보고 오며가며 수없이 눈을 마주치고 목례를 하고, 어색한 몇 초를 함께 걸어야 할 땐 밥 먹었냐, 날씨가 춥다, 정도의 인사를 전하고 살아야 하는 가늘고 긴 관계속의 우리들은 코로나가 밉지도 고맙지도 않지만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해서 더욱 더 마음이 애매하다.
애매한 반찬들은 비빔밥으로
친하거나 안친하거나
친하거나 모르거나
친하거나 싫어하거나
같은 이분법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거나 정리당하며 살아왔지만
내 일상에 가장 많은 시간과 가장 오랜 세월을 걸치고 있는 애매한 관계들, 가까워지기도 부담스럽지만 멀어지기도 힘든 우리의 관계는, 회식과 모임이 필요한 우리들의 관계는.. 어떡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