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포부는 내 직장이 망할때까지 나의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의 고용유지여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잘릴 때 까지는 나오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직업에 대해서 "자아실현"의 도구라고 배웠다. 멋지다. 실현할 자아가 있다는 게.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직업을 생각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부터 결혼하고 난 30대 초반까지.
내 존재가 사회에 이바지할 부분이 있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한해한해 살았다. 나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나는 확신했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고. 더할나위없이 뿌듯한 직업이다.
30대 중반,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내 직업에 대한 생각은 점차 생계적 관점으로 바뀌었다. 실현할 자아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아를 '에너지'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자아를, 그 에너지를 아기 똥기저귀 갈아주는 데에 써야했다. 에너지를 남겨(남겼는지, 잘 분배했던 건지) 이런 치열함 속에서도 연구를 해서 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의 나에겐, 사실 지금의 나도 공부를 더 하는 길을 가진 못하겠다.
나의 '자아'라는 원대한 존재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부족하고 뭘 하든 깜냥이 안되는 것 같고 좀 소심했지만 '돈'의 필요를 피부로 느끼면서부터 나는 적극적인 인간이 되었고, 더 많이 일했고 열심히 일했다.
30대 중반의 나는 생계형 인간이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지속했다. 오히려 직업에 대한 애정이 더 쌓여갔다. 정규직에 비하면 월급도 낮고 퇴직금이나 다른 복리후생은 전혀 없지만 내가 나의 일하는 시간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복리후생이었다.
글의 내용과 큰 상관없지만 너무 웃겨서요ㅋㅋ
친구들이 아이의 언어발달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니 직업 대박, 나 지금이라도 대학원갈까, 라고 물어올 때면 근거없는 뿌듯함이 솟구쳐 올라오기도 했다. 티는 내지 않았다. 후훗.
그런데 왜 나는, 나의 포부에 변화를 주려고 하는가. 이제와서 왜.
이제 똥기저귀 갈아줄 필요도 없고, 자기의 신변처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건만 왜.
1. 전업주부가 되고 싶은 이유
첫째로, 가져보지 못한 직업이라서.
물론 출산을 위해 2-3개월(출산휴가가 보장되는 직군이 아니었지만 인정상 출산 후 복귀를 보장해주셨다), 코로나로 인한 3개월 휴직 등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때의 나를 '전업주부'라고 할 수는 없다.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 2-3개월의 전업주부는 임시직이라 가사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생활의 많은 비중은 집보단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가지지 못했던 직업에 대한 동경이랄까. 그렇다면 가지지 못한 직업은 많다. 의사, 발레리나, 판사, 펀드매니저 등. 세상엔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별로 없다. 내가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 현실성이 있는 것이 전업주부이다.
둘째로, 내 어린시절엔 엄마의 부재가 없었다.
나 어렸을 땐 일하는 엄마가 많지 않았다. 친구집에 가도 우리집에 가도 늘 엄마가 계셨는데 분당으로 이사오고 나서는 일하시는 엄마들이 많았다.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으로 바로 갔다. 집에 가봤자 엄마가 없다며. 할머니가 계시는 경우도 드물었던 것 같다.
나는 집에가면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있는게 자랑스러웠고 나의 안정감이었다. 엄마는 내가 조잘조잘 얘기할 상대가 되어주셨고, 간식도 만들어 주셨고 그리고 엄마는 책을 읽으셨다.
셋째로, 생계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ㅋㅋㅋ모르겠다. 이 부분은. 생각해보았다. 엄마께 드리는 비용, 앞으로 들지도 모르는 사교육비(내 퇴근시간을 맞추기 위해 학원을 돌린다면)를 생각하자니 내가 돈 벌러 나가는게 그래도 낫긴 하지만 내가 집에서 수학문제집풀이라도 봐주는 게 돈을 덜 쓰는 일이 될 것 같다.
영어수학에 대한 생각은 경험치가 쌓이면 말해보겠다. 입시대국에서 아이의 교육에 대해 말하면 "그래서 니 아이 몇 점이나 받아? 어느 대학갔어?"로 증명해야하는 것이 맘 아프다. 내 아이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한다. 일단은 그것이 핵심.
넷째로, 굳이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40이 넘은 직장인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15년 넘는 직장생활 중에 쉬어본 적이 없다. 쉰 것이라면 위에서 말한 출산휴가 2-3달, 코로나 3달이 전부다.
직장생활이 자아실현이라면 이제는 실현할 자아가 없기도 하다.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라고 멋지게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뭐 굳이 충전하고 싶은 것도 없다. 쉼이 필요한 것이라면 평소에 잘 쉬긴 한다.
이유가 없는데, 이유없음에 대해 남편이 이해했다. 신기하다.
2. 1년이나 준비하는 이유.
마음이 단 번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원하는 일이긴 하지만 마음을 잡는 것이 어렵다. 급차선변경은 위험한 것 아니겠나. 남편의 공감은 얻었지만 나를 퇴직할 때까지 생업전선에서 못 내려오게 하실 엄마에게 공감을 얻어야 할 일이 일단 숙제다.
나는 모성애가 부족하고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는 편이다. 아이들에게 짜증을 더 많이 내지나 않을지 스스로 객관화 하며 미래의 나를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 가면 엄마가 있는 게 안정감이었는데 아이들에게 집에 가면 엄마가 있는 것이 감옥같이 느껴지면 안되니까. 나도 아이들에게, 아이들도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돈. 돈돈돈!! 기승전돈돈돈ㅋㅋㅋㅋㅋㅋㅋ 돈은 느무느무 중요하니깐요!
애들 학원비도 감당 못할 수준의 돈을 벌지만 그것도 버는 거라고 나는 비자금을 형성했고 여행가고 싶지만 남편이 주저할 때마다 "내가 숙소비낼께!"하면 금방 여행계획이 성사되곤 했다.
앙리 마티스 특별전, 로자리오 성당을 가기위해선 프랑스로 가야합니다. 가기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일단 코로나가 끝나야겠죠ㅠㅠ
이제 어떡하나 싶다. 작년 말에 좁고 깊었던 비자금을 주식에 넣었더니 나의 계좌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7%의 수익도 본 적이 없는데 -7%라는 경이로운 마이너스수익률을 마주하고 있다. 잡주에 넣은 건 1도 없는데 다 고점에 물린 게 문제인 것 같다. 이제 숙소비허세도 못 부릴텐데.
주식이 오르지 않더라도 나는 잠자코 기다릴 수 있는 대담한 사람인가.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나의 역할을 찾아서 해낼 수 있는 창의적인 사람인가.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후회를 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만큼 살아도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이렇게 글로 마음을 풀어가며 마음을 잡든 다시 놓든 해야할 것 같다. 한 번에 다 쓰려니 아직 풀어내지 못한 마음이 남아 다음 회에 계속...ㅋㅋㅋㅋ(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ㅋㅋ 결혼을 이렇게 고민하지 그랬니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