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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Apr 04. 2021

삶과 죽음의 틈에서

그 깊고도 넓은 틈

 지난 월요일에 절친의 아버지 부고소식을 접했다.


https://brunch.co.kr/@kimojung/148


 너무 허망했고 너무 놀랐고, 예기치못한 슬픔앞에 무엇을 준비해야하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경사보다 조사를 더 많이 갔지만 남의 일 일때는 남의 일이라 몰랐고, 내 일에 가까울 때는 정작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른다.


 그렇게 우왕좌앙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채로 나 뿐 아니라 남편도 장례식의 일들을 도왔다.


 남편은 궂은 일도 티나지 않게 하고 어디서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다. 센스가 있는 편은 아닌데, 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유세없이 한다. 잘한다. 궂은 일이 많은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특기가 더 빛났었나보다. 친구의 제부가 남편을 상조회사에서 파견나온 직원인 줄 알았다고. 파견직원의 활약후기를 얘기하며 친구와 함께 웃었다.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조정하지 못한 일정이 있었다. 3주쯤 전에 혼자 앙리 마티스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너무 감동먹어서 딸을 데리고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마침 KT 50%할인이라며 절친이 예매도 해주었던 터였다.


 전시는 4월4일까지인데 주말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아무리 일정을 조정하려고 해도 친구아버지의 발인날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모시기로 해서 꼭 가고 싶었지만, 딸과의 약속은 약속대로 지켜야 해서 미안한 마음, 슬픈 마음을 누르고 딸과 마티스전에 갔다.



 그림그리기에 관심이 있고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9살 딸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집중력으로 전시를 관람했다. 마티스의 대표작은 알고 있기에 기존에 알고 있는 작품과 비슷한 작품에 더 눈길이 가는 나와 달리, 배경지식이 별로 없는 딸은 나에겐 생소한 삽화와 붓그림에 더 관심을 보였고 그 단순한 그림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이제 우리는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가 되겠구나 싶어 행복함을 느꼈다. 간만의 서울행이라 나는 다소 흥분했고 (구)코엑스, (현)스타필드 구경도 함께 했다. 건강한 몸과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말이다.


 내 절친은 상중인데 나는 이리 기뻐하다니.

 사람은 무얼까.

 내 자신에게 조차 신기한 감정을 느끼며 이번 주를 보냈다.


 말로 할 수 없는 슬픔과 믿을 수 없이 기쁜 현실이 교차한 시간이다.


그 와중에 더현대서울도 갔었네요.

산다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닌가.

죽는다는 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닌가.

삶과 죽음이 가까운 줄 알고 살지만 또 아득히 멀다.

그 먼 틈 사이, 깊고 넓은 애통함 속에서도 웃을 일이 있었고 웃을 일엔 웃으며 웃음을 즐겼다.


웃는 중에 친구 언니의 이사를 이야기하고

웃는 중에 안치할 곳을 결정하고

웃는 중에 주변의 일들을 말했다.


슬픈중에도 웃음을 외면할 수 없는 게 사람이구나 싶었다.

괴로운 중에도 유머를 들일 여유가 있구나. 이럴 때 웃음도 나오는 게 사람이리라.

우리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아 질 수 있지 않을까.


별일 없이 평범한 하루가 기적이라는 것을.

불만과 짜증의 감정도 평범한 감정이며 이런 감정을 내가 자각하는 것도 기적이라는 것을.

이런저런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생소할 만큼 빨리 잊는다.


 외국여행가면 꼭 공원에 가고 그 공원엔 꼭 묘지가 있었다. 묘지를 볼 때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 참 멋지고 아름답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공존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니 생각만큼 멋지거나 아름답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이별은 일단은 아픔이고 괴로움이었다. 그런 아픈 감정이 더 컸다.


 아픔이 아무는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과 상관없이 웃었던 시간이 있었다. 슬픔만으로 꽉찬 시간은 없나 보다. 드문가 보다. 그렇게 인생의 한 순간을 배우고 견딘다. 울면서도 웃으면서.


 이런 일을 겪는다고 다 단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이전과 마찬가지의 유리멘탈로 살지도. 그냥 '나도 이런 경험을 해봤다'는 수준의 기억만 갖고 살 수도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해도 더 슬프고 더 괴롭고 더 웃음을 찾을 지도 모른다. 비슷할 뿐 똑같은 경험은 하나도 없고 똑같다고 해도 그것을 대하는 나는 달라져 있을테니.


같지 않고 똑같지 않다.

그 순간의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다.


생의 모든 순간이 새롭고 낯설다. 몰라서 웃고 몰라서 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틈에서 생의 시간을 채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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