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정 May 15. 2021

독립을 위한 의존

우리가 더 오래 함께 하려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당시의 남친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고, 나도 버금갈 정도로 최선을 다하긴 했다. 분명 그거슨 사랑이었다. 지금이야 헛웃음도 안 나오지만 인생에 그런 순간이 있었다.


 살아보니 인생에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사랑도 분노도 그냥 그런 시즌엔 그냥 그렇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사실 떠올리지 않아도 살긴 한다. 믿기지 않는 시절이지만 내가 경험한 시절이니 믿을 수 밖에 없고, 그래도 안 믿어지면 외우기라도 한다는 심정으로, 가끔 그때의 감정이 필요할 때 조금씩 떠올려 지금의 미적지근한 정서를 조금 볶아본다.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반드시 흘러가야 하고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나도 나이를 먹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나도.


동거인에게 묻지도 않는 안부, 파인땡큐앤뉴?


 그 즈음엔 쉬고 싶을 것 같아서 그냥 마련해둔 휴가가 있었다. 2012년 봄. 남자친구가 생겼다. 휴가는 살아있고. 만날 약속을 정하자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나 몇 월 몇 일 휴가에요."

 "아 그래? 그럼 그날 나 반차낼께!"


  당시 남친은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안 될 확률도 있는거 아닌지,  등을 확인하지 않았다.


 실제로 남친은 휴가를 냈고, 우리는 지금도 기억할 만큼 재밌었던 데이트를 했었다. 내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강아지인가 세상이 아니, 남자친구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을 기억한다.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다. 신혼집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바라던 우리만의 공간이다. 낮이건 밤이건 우리 둘 뿐이다.


 연애시절, 그렇게도 음침한 곳을 찾으며 질척대던 사람은 내가 결혼한 사람과 다른 사람인가.

안 만져, 안 만져요. 

 음침할 때는 물론 환할 때도 만질 수 있는데, 만져도 되는데, 날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안 만져. 안 만져요.

저는 그대로에요. 아무도 안 만지니까.


 남편은 달라진걸까. 날 사랑하지 않는걸까.


 결혼은 했어도 우리 둘인 건 똑같으니까 평일에도 밖에서 만나고 싶고, 외식도 하고 싶고, 휴가를 맞춰 함께 놀러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된 옛남친은


 "그날은 안 것 같아."

 "갑자기 휴가내라고 하면 좀 부담스럽지."

 "내일 회사가서 상황보고..."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휴가내겠다, 달려가겠다, 니가 좋다면 나도 좋다아아! 라고 했던 그 남자는 어디갔지?




 남편은 날 만지지 않았지만 아이는 생겼다. 초능력이다. 난 동정녀인가. 혼자서는 먹지도 자지도 서지도 못하는 아이를 혼자 먹고 자고 설 수 있는 아이가 될 때까지 정말 내 영혼과 육체를 갈아넣었다. 정신의 피폐함과 우울도 함께 넣었다.


 '조리원에서 살은 다 빼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연예인 및 내 주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더 특별한 노력으로 살을 빼야했고 우울이 또 보태졌다.

 

 아이가 혼자 먹고 서고 말도 할 수 있을 즈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1년 반 붙어있었으면 충분했다. 으앙~ 하는 소리에 자동반사되어 아이에게 가진 않더라도 아이쪽으로 고개는 돌렸던 나. 마치 연애시절 '모레 휴가에요'하는 말에 '그럼 나도 휴가'라고 반응했던 남편처럼.


 아이에게 자아가 생길수록 엄마인 나에게 더 애착을 보였지만 지금보다 더 길게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떨어져서 각자의 시간속에서 적어도 나는 내 정신을 가다듬고 돈을 벌거나 나가서 인간답게 커피라도 마시고 와야했다.


 날 만지지 않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어느 순간부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지지도 않았고. 하지만 자기가 해야할 것 같은 일을 '알아서'했다. 화장실 청소, 주말에 아기와 둘이 나가 놀기, 목욕시키기, 빨래 개키기, 셔츠다림질 등 우리가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


 좀처럼 사랑을 표현하진 않지만 남편의 그런 행동을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굳이 사랑까지는 아닐 수도 있다. 그 일을 안하면 저여자에게 죽을 것 같아서.. 일수도 있겠다. 나는 믿고 싶은대로 믿는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고.



 아이는 엄마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더 같이 있고 싶기에 엄마와 떨어지는 것은 마치 형벌같을 수 있었겠다. 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느꼈듯이.


 사랑한다고 하루종일 붙어있을 수 없고, 낮이건 밤이건 불태울 수 없다. 인생은 사랑보다 길기에 우리가 살아내야 할 지난한 세월을 그래도 사랑하는 듯 살아가려면 우리는 떨어져서 각자의 일을, 각자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더 오랜 시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동력임을, 결국 누려야 하는 것은 각자의 인생인 것을 살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 뿐 아니라 나도.

연애했던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을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니까.




  존 버닝햄의 <알도>라는 그림책이 있다.

(영어꿈나무들을 위해 영문으로 읽어도 참 좋은 표현들이 가득한 책이다)

주인공인 아이가 '알도'라는 토끼를 만나서 성장하며 변화되어 가는 내용이다.



엄마랑 놀이터에도 가고 외식도 해서 신이 난다지만 아이의 모습은 전혀 신나보이지 않는다.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주는 메세지가 이 페이지안에 다 담겼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전 그림책의 그림은 내용을 묘사하는 역할이 주를 이루었다. 화가나 디자이너가 삽화식으로. 하지만 이젠 내용과 그림이 각각 메세지를 전달한다. 내용은 '신난다'이지만 정작 주인공은 '신난다'하는 아이들의 관찰자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를 내용 뿐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도 전달한다. 그림이 글의 배경이 아니라 각각 그 역할을 한다. 이제 그림책은 어린이만의 것이 아니다)



많은 장면에 알도가 등장하며 같이 시간을 보낸다. 주인공은 알도가 이끄는대로 따라가지만 알도는 주인공의 모든 순간에 다 함께 있어주진 않는다.



주인공 역시 알도가 모든 순간에 함께해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도 믿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자기 곁에 있을 거라는 것을.




 내 아이도 커가면서 알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고 언제나 자기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곁에 있어 줄거라고 믿고, 있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가족과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서로 건강하게 독립하게 위해 서로 건강하게 의지한다. 건강하게 의지해야 한다.


 독립도 했다가 의지하기도 했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했다가 어느 한 편에만 설 수 없는 약한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우리는 서로를 원하고 찾겠지만 원하고 찾을 때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독립한 인간으로서의 나도 멋있으면 좋겠다.


 9살이 된 딸은 혼자있고 싶다며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7살에 혼자자고 싶다며 늘 같이자던 남동생을 안방에 들여보내고 내 방으로 휙 돌아서 가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울 엄만 지금도 말씀하신다. 딸의 독립과 의존의 반복이 시작되었구나.


 너도 자라고 나도 자라고 있구나 싶다.


 이렇게 우리는 거대한 사랑 안에서 독립과 의존을 반복하며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과 죽음의 틈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