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인 딸이 피아노 배운 지 1년이 넘어간다. 1년 반 정도 성실하게 다녀서 그런지 내가 듣기에도 발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잘 치는 수준으로 가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므로 뭔가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피아노콩쿨이 있다고 원장님이 알려주셨다.
첫째도 대회에 나가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서 신청했고, 그 후로 두달은 매일 가면서 연습했다.
코로나시기를 거치는 동안 예정되어있던 대회가 없어지기도 하고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기도 해서 원장님이나 나나 조금은 초조한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강행한다고 했고, 드디어 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학생1 보호자1 만 입장 가능하다고 해서 남편이랑 둘째는 차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둘이 내렸는데 막상가보니 엄마아빠할머니 다 오신 분위기였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대기실로 들어가는 건 아이(와 원장쌤)의 몫.
나는 공연장에서 기다릴 뿐.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잘 몰랐어서 어수선하게 있다가 이제 들어가볼까 해서 들여보냈는데 조금이라도 늦었음 큰일 날 뻔했다. 아이는 169번이었는데 대회장 들어가니 160번이 치고 있었다.
딸이 나간 대회는 예선과 본선이 있는 그런 메이저대회가 아니다. 피아노를 한창 배우는 아이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동기부여를 위한 대회였다. 그래도 아이가 긴장하지 않고 잘 치고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나는 많이 떨렸다.
딸램씨가 유튜브에 올렸냐고 진짜 오천번은 물어봐서 그냥 무편집원본으로 업로드했다. 남편도 찍었다고 해서 잘 편집해서 올리고 싶었는데.
대기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서 치는 바람에 손도 안녹은 상태였을테고(안에서 핫팩 주셨다고 한다) 떨렸을텐데 아침에 연습했던 것 만큼 했던 것 같아서 뿌듯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나도 딸 정도 나이였을 때 이런류의 대회에 나간적이 있다.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유일하게 나갔던 대회라 내가 입었던 옷, 엄마가 입었던 옷, 내가 쳤던 곡도 다 기억한다.
그 대회에서 나는 특상을 받았다. 대상 다음 특상.
대 특 금 은 동 장려
이 순서였는데 내가 상을 받으면서도 좀 이상했다. 스스로 듣기에도 그렇게 잘 치는 편이 아닌데 특상을 받는다는게. 심사위원은 제대로 듣고 상을 준 건가 싶었다.
나는 잘 치고 싶었지만 못 치는 애라 체르니100번을 두 번 반복하고 체르니 30번으로 넘어갔는데도 잘 못쳐서 얼마나 혼나면서 배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피아노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이었어서 진짜 노력했다, 진짜 열심히.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열심히"란 말을 믿지 않게 된 것.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갓 10살을 넘기고 나서 10살의 인생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특상 수상은 한때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나는 문과+인문계열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생이 되어 지나던 길에 우연히 너무 신기한 우연으로 그때 같은 피아노학원에 다녔던 친구를 만났다.
나는 그냥 지잡대 사회복지학과에 다닌다고 했더니
"진짜? 너 피아노 안쳐?"
"피아노?"
"너 특상받았잖아!"
"어? 아.. 그랬지"
"근데 피아노 계속 안했어?"
"그거 그냥 뭐...나가면 다 주는 거 아니었냐? 나 잘 치는 편 아니었잖아."
"뭐야~ 잘 쳤으니까 특상이지, 나 그때 은상받고 음악하기로 결정했잖아."
"아 그랬어? (레알깜놀) 지금 피아노전공해?"
"아니, 작곡. 삼수해서 들어갔어. 올해"
깜놀, 지인짜 깜 짝 놀 랐 다
이런 대회가 기폭제가 되어 진로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구나.
대회란 뭘까.
몇 백명 단위가 참가한 이번 대회의 결과가 이틀 뒤면 나올거라고 했다. 그 역시 깜놀이었다. 점수 넣고 엑셀돌리나.
인생일대 귀한 경험.
그런 무대도 관중도 경쟁자도.
이 날이 이 아이에게 무슨 의미일까.
아이가 친 연주영상을 보여드리니 엄마도 나 대회나갔을 때 생각나서 뭉클하다며 내가 대회때 찍었던 사진(사진사에 돈주고 찍음)을 기념으로 나란히 걸어놓으라고 하셨다.
엄마, 얘는 사진신청안했어ㅋㅋ
대회의 여운을 가득 담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피아노학원 원장님이셨다.
"너무 아침일찍이죠? 결과가 나와서요. 준대상이예요 어머니! 대상 다음 준대상. 어머니도 긴장많이 하셨었죠? 아이에게 정말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원래 말씀이 빠른 분이라 뭐라 대답할 새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고생많으셨어요 원장님."
딸은 당연히 너무나 기뻐했고, 엄마가 받았던 특상보다 더 높은 거 아니냐며 신나했다. 늘 제정신 아니고 분주하던 아침시간이었는데 수상소식 덕분에 축제의 시간이 되었고, 아침부터 친가 외가 조부모님들께 보고 드리며 일생일대의 활기찬 아침을 보냈다.
꼭두아침부터 수상기념 특별연주를 하시더니 나한테도 쳐보란다.
"엄마, 엄마도 대회나갔을 때 쳤던거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지? 한 번 쳐봐."
"그래! 당연히 기억하지! 실력은 여전할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쳤다. 근데 손가락에 살이쪘는지 다른 건반을 치거나 미끄러지거나 했다. 가만히 듣던 딸이
"엄마 나보다 못치네."
이상하게도 이 말이 너무 듣기 좋았다. 얘가 나를 이겼구나.
하하. 그렇지, 이젠 너보다 못치지. 니가 바이엘정도 쳤을 때 너보다 잘치는거였지, 지금은 못치지. 니가 훨씬 더 잘 치지.
살다보면 부모를 이기고 넘어서는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의 세상은 부모의 세상에 갇혀있지 않다. 아이는 부모 밖으로, 어쩌면 세상 밖으로 까지 나아가야 하기에 아이에게 부모는 꼭 넘어서야 할 과정으로서의 존재랄까, 그런 것 같다.
겉으로는 부모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이 아이안의 세상은 나보다 넓고 아이의 재주는 나보다도 뛰어나다. 앞으로 더 많이 이기고 더 많이 성취해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