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을 준비한다고 쓰고 이혼을 준비한다고 읽어야 할 것 같다.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농담이(어야 한)다.
나는 평소에 주장이 조금 강한 편이나 고집이 센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주장을 강하게 펼치지만 반대의견에 부딪히면 바로 굽히는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바, 굽혀서 상대의 의견에 따랐다가 잘 되면 엄청 좋은거고 안 되면 계속 궁시렁거리며 뒤끝을 늘어 뜨리는 편이다.
평소 나의 스타일을 모를 리 없는 남편은, 내가 특히 여행에 있어서는 소신과 줏대가 너무 있다는 것을 너무 알고 있는 남편이 어느 날 말했다.
"파리에 처음 가는 거라 넘 좋은데... 자기는 여행가면 좀 강해지잖아...비싼 돈 내고 가는데 힘들고 후회할까 봐 좀 걱정돼...."
"(어라? 진실토크인가)그동안 쌓인 게 많았구만!"
"아니...나는 다 참을 수 있는데.. 이번 여행은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여행이니까 지금 자기는 책 읽고 막 준비도 많이 하고 있고....막 미술관에 가서 작품 찾는다고 뛰어다니고 막.. 그러면....... 굳이 미술관이 아니라도 좋은 데를 발견할 수도 있고 유명 작품을 보지 않아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작가의 멋진 작품을 발견할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
"우린 몰랐던 작가의 놀라운 작품을 발견할 만한 혜안이 없어"
"아 그니까 그 뜻이 아니고...... 일단 자기가 하잔데로 할 건데 나도 가고 싶은데 있으면 이번엔 강하게 말할거야!! 이번이 우리 인생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겠지만, 가서 좋으면 또 가고 싶단 생각이 들거고, 그러면 더 열심히 돈 모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좋은 거잖아. 거기까지 가서 싸우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몇 백 날리고 그건 추억도 아니고 진짜...."
역시 루브르는 가이드투어 추천!
"출발도 안했는데 싸울 걱정을 해? 나랑 싸우고 싶어? 그리고 마지막?"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의 해외 여행은 없어."
"아.. 뭐.. 그렇다 치고 그럼. 내 생각에도 목돈 들여 가는 건데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거든. 루브르는 가도 안 가도 후회라고 하고, 너무 넓은데 그렇다고 안가긴 그렇고, 해서 난 가이드 투어 하고 싶거든. 오빠가 원치 않으면 한 3시간 정도 오빠하고 싶은 거 하다가 만나고, 그러면 어때?"
"에~~~그래도 일심동체인데 같이 다녀야지~따로 다닐거면 그냥 혼자 가면 되지."
"혼자 가게 해줄거야?"
"그거슨 아니지 그거슨~~가이드 투어 하자~ 나도 준비하다 보면 관심이 생기겠지."
"5만원 넘어."
"(동공 완전 확장) 아......그럼 일단 생각을 좀 해보고....암튼 서로서로 양보하면서....다니자고, 응? 오빠가 돈 열심히 벌잖아."
"쌓인 게 많았구만 아주 청산유수네. 찌질하게 이제 속풀이 하냐."
"오빠 열심히 살잖아. 좋아야 다음에 또 가고 싶지..계획했던 걸 못하게 되더라도 더 좋은 게 있을 거야."
"계획한 대로 안 될 거라는 악담하지 마. 다시 못 올 기횐데 최대한 계획대로 다 해야 돼! 지나면 추억이라지만 지날 때까지가 고통이야!"
"뭐 그렇긴 하지..그래도 좋으려고 가는 거니까~~ 이번에 재밌어야 다음번에 또 갈 생각 하면서 돈 벌지.."
"알았어. 노력할게. 오빠가 맞춰주는 거 알긴 하지 나도."
알긴 안다. 우리가 이 정도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에는 남편의 인내심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남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기만 했었는데 막상 말이 되어 내 귀에 들리니 좀 섭섭하기도 했다. 글로 쓰니 차분한 느낌인데 수시로 우리는 한숨을 쉬거나 목소리가 커지거나 말을 끊거나 해서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라는 말도 중간중간했었다. 이러다 정말 빈정상해 싸울 수도 있겠는데 싶기도 했고, 확 그냥!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홧김에 안가! 해버리면 그간의 노력이 사라지는 거다. 너무 아깝다. 가서 싸울지언정, 가기 전에도 싸울지언정 일단은 비행기를 타야 한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게 여행이라거나 하는 낭만적인 여행의 문구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래도 우리네 삶이라는 게
내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고
이젠 여행갈 만한 시점이라고
자체 평가하면서 계획하고 준비해서 딱 떠날 수 있는 그런 모양이 아니다.
내가 과연 몇 백을 들여 여행을 갈 만한 인생을 살았는지 끊임없이 자아성찰 하면서 동시에 통장을 들었다 놨다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항공권 사이트를 드나들며 시시각각 변하는 가격을 외울 정도로 눈과 머리에 박아놓고 결제하기까지 얼마나 번뇌를 하던가.
게다가 환전할 때는 더 미친다. 내가 일이천만원 환전하는 것도 아닌데 몇 원 달라지는 것을 눈알 튀어 나오도록 감시한다. 감시한다고 나 좋은 쪽으로 환율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나고 난 뒤에 추억이 없을지언정 한정된 자원(시간과 돈)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차질 없이 다 하고 오는 것이 평민의 여행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한때는 열정남녀였지만 이제 기혼남녀가 된 우리 둘의 여행은 어떤 모양일까.
아이 없는 시간, 아이 없는 여행을 그렇게 원했음에도 막상 원했던 시간이 다가 온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우리가 아이 없이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고, 차라리 아이와 같이 가는 것이 나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서로에게 뻗쳐질 에너지가 지금은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고, 아이들이 잠들기 까지 많은 에너지를 쏟고 나면 지치기 때문에 서로에게 적당한 무관심과 부족한 애정으로.
어쩌면 아이들 덕분에 우리 부부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건 아닐까.
지금이 신혼여행이라면 서로에 대한 심한 사랑과 환상으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사랑과 환상의 유럽 여행을 할 지도 모르겠다.
결혼 7년차의 유럽 여행이란.
아직 10년이 된 건 아니기 때문에 우정이나 전우애로서는 좀 부족한 면도 있는 것 같고,
아직은 사랑이라고 할 만한 감정도 남아 있긴 한데, 사랑으로 다 발라 버리자니 서로의 진상적인 부분들은 상당히 정확하게 알고 있고,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덕분에) 적당히 그 진상을 모른척 할 수 있는데 아이가 없는 일주일동안 그 진상을 견딜 수 있을지.
그래도 솔직히 나만 조심하면 될 것도 같다.
조심하고 양보하고 배려해 보도록 노력하자.
이번에 잘 넘기면 10주년에 진짜 거하게 갈 수 있을지 알.......건 모르건 간에 우리가 7년이나 함께 산 것이 시간의 선물인 것을 확인하고 오자.
확인은 여기서도 할 수 있지만, 일상으로 초대한 판타지 속에서 확인해보자. 한 번 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