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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Feb 03. 2024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이성과힘/ 독서토론 논제 포함 >

 거듭 시도한 끝에 완독한 난쏘공 

1년 전에 읽기를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다시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쳐다볼 때마다 들었던 기분은 누구나 가보고, 해보고, 가졌는데 나만 그렇지 못했을 때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이었다. 중도 포기한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모호한 대사 때문이었다. 생동감이 없었고 인물들이 혼을 빼놓은 채 이야기 하는 듯한 장면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다시 집어 든 이유는 알아보지 못한 책의 진가를 기어이 파헤치고픈 마음에서였다. 역시 잘한 일이었다. 같은 책도 언제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다가온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 

난쏘공은 70년대 급변하는 도시의 개발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성과 인간소외를 다룬 소설집이다. 단편들의 모음이지만 장편소설을 단락으로 나눈 것처럼 주인공들이 하나의 관계 안에 엮여있었다. 출간 된지 50여년이라는 세월의 갭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100만부가 넘는 판매기록과 여전히 꾸준히 읽히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흔히 세상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하곤 한다. 예전과 비교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인다고 해도 과연 이 말은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말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 사는 사람’과 ‘부자인 사람’의 뜻을 혼용해서 써 왔다. 잘사는 사람은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아졌다’라는 말은 기술이 발달되어 편리해졌으며 불합리한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말이지만 누구나 그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살기 좋은 세상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적인 궁핍함까지 배가되었다.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살기 좋은 세상일 수 있으나,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억압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무반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세련되었다.  


낙원과는 거리가 먼 ‘낙원구 행복동’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낙원구 행복동’ 이라고 일컫는다. 재개발로 인해 강제철거 대상인 판자촌이다. 은강시는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일하지만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그들은 죽어간다. 한 가정의 가장인 난장이, 큰아들 영수 그리고 그들에게 낙원을 꿈꾸게 하는 신비의 인물 지섭이 주요인물이다. 인물들은 모두 죽는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낙원은 없었다. 


은강시의 기업은 왜곡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다. 아버지 난장이는 그런 행위를 사랑의 상실로 보았고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큰아들 영수는 아버지가 꿈꾸는 세상에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영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순진한 청년이었다. 


지섭은 배운 사람이다. 노동을 착취당하는 은강시 사람들을 깨치기 위해 난장이, 영수 그리고 부잣집 아들 윤호에게 영향을 끼친다. 지섭이는 영수에게 고급 노동운동 지도자가 되라고 한다. 현장을 뜨지 말고 현장 안에서 행동하고 생각하라고 한다.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의 앞뒤 부분에는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라는 두 가지 수학적 개념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영수는 클라인씨의 병을 보고 말한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에요.”

클라인씨 병은 안팎은 없지만 닫힌 공간이 있다. 안팎이 없는데 어떻게 닫힌 공간이 가능한 것일까. 과학자는 눈앞에 자신이 만든 실체(클라인씨 병)를 두고도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뫼비우스의 띠에서도 안과 밖이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에서 말하는 안과 밖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소설 안에서 갖는 모든 대립구조를 안과 밖이라는 개념에 대입해 보기도 했다. 안과 밖, 노동자와 이용자, 부와 가난, 정상과 비정상 등 대립되는 모든 것들에 화해 가능성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을까. 화해 가능성은 오직 이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야기 나눠볼 만한 논제거리들 

논제1> 

돌아온 지섭이와 영수의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지섭이 영수에게 어째서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자, 영수는 임금협상과 부당 해고자 복직 등에 자신이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영수는 지섭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섭은 “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을 따라 했을 뿐야”라고 말했으며 “어떤 일이든, 무지가 도움을 준적은 없어.”라며 영수에게 화가 난 듯 말합니다. 그러자 영수는 자신이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변명을 하는데요. 그런 영수에게 지섭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현장 안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깥에 나가서 뭘 배워? 네가 오히려 이야기해줘야 알 사람들 앞에 가서 눈을 떴다구? 장님이 돼버린 거지. 장님이. 그리고 행동을 못 하게 스스로를 묶어버렸어. 너의 무지가 너를 묶어버린 거야. 너를 신뢰하는 아이들을 팽개쳐버리구.”

지섭이는 영수의 노동운동 방식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지섭이 영수에게 바라는 노동운동이란 어떤 방식이었을까요?(p.254~257)


논제2> 

목사는 매주 기술과학 교육을 위해 과학자를 초청합니다. 지섭이 다녀간 후 영수에게 일어난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과학자였습니다. 영수는 과학자가 만든 ‘클라인씨의 병’을 보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실체가 있음에도 병은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학자조차도 “그럼 이것은 뭡니까?”라는 영수의 묻는 말에 “그것은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영수는 과학자를 찾아와서 이제 알았다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을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 그리고는 영수는 유유히 공장을 향해 걸어갑니다. 영수가 이해한 안과 밖은 무엇이었을까요? (p260~263)


<논제3> 

영수는 과학자에게 클라인씨 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 유유히 공장를 향해 갑니다. 사장의 동생을 사장으로 착각하고 칼로 찔러 죽이는데요. 영수가 클라인씨 병에 대해 한 말과 살해를 하게 된 동기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논제4> 

꼽추와 앉은뱅이는 입주권을 헐값에 매입해 가는 업자를 불에 태워 죽입니다. 영수는 공장사장의 동생을 칼로 찔러 죽입니다. 소설 곳곳에서 약자들은 폭력성으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반면 가진자들은 거짓말, 갈취, 횡령 등의 폭력성을 행사합니다. 한마디로 방법만 다를 뿐이지 폭력성이 난무한데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비교해 볼 때 폭력성은 어떤 형태로 변화해왔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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