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서고정리를 한 후 폐기해야 하는 책들을 쌓아두고 여러 날 고민을 했다. 문밖에 내놓기만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것이란걸 알지만 이번에는 왠지 마음이 자꾸 머뭇거려졌다. 부쩍이나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많아진 요즘이다. 그 이유야 내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만큼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의 개인 사정들은 제각각일 것이다. 생활이 어려워 정말로 이일마저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분도 있다. 우두커니 집에 외로이 앉아 있는 것보다 움직이면서 시간을 보내고 덤으로 작은 용돈도 벌고자 하시는 분도 계신다.
이유만큼이나 건강상태도 다양하다. 다리를 절뚝거리시는 분, 허리가 굽어 카트에 몸을 의지한 채 걸으시는 분, 왜소한 몸으로 빈 수레마저 버거워 보이는 분이 있다. 하루에 두어 번 카트 끌고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것으로 이마저도 운동이라고 우기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계를 위한 분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저렇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은 그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백원이 안 되는 폐지 1킬로그램, 넘치도록 높게 쌓은 리어카라야 30킬로그램 남짓, 그래야 3천원이 안 되는 돈이다. 인도는 턱이 있어 카트 끄는 일이 힘들다보니 위험한 차도로 다니는건 다반사다. 위험천만하고 황당한 경우도 몇 번을 목격했다.
며칠 째 나는 폐기도서를 끌어 앉고서 마치 돈 될 만한 큰 프로젝트 수주 맡길 업체를 물색하듯 요리조리 두리번거렸다.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분께 드리고 싶었다. 드디어 오늘 카트 위 빈 박스 하나 달랑달랑 싣고 가는 빼빼마른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비옷을 입고 나오셨다. 버릴 책이 있으니 비가 오지 않는 날 오시라고 했더니, 지금 비가 많이 안 와서 괜찮다며 지금 가지러 가겠다고 하셨다.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릴까하는 불안함에 그러신 것 같아 말릴 수는 없었다. 책 일부를 실어 보내 드렸다. 또 다른 곳 옆 동네인 청파3가에 생계형 노인 부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손수레로 가지러 오기에는 먼 거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차를 가져와서 트렁크에 가득 싣고 위치를 파악한 후 가져다 드렸다.
갔을 때 할아버지 혼자 폐지를 정리 중이었다. 이웃의 배려로 폐지들을 모아 쌓아두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침 옆 가게 아주머니도 와서 할아버지께 폐지 가져가시라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어려운 노부부를 위해 주위에서 그렇게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셨고 환하게 지으시는 미소사이로 틀니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듯 했다. 어르신의 밝고 맑은 표정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독서관련 모임에서 ‘고립과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폐지 줍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노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4대 고통이 있는데 건강, 빈곤, 외로움, 일이 없는 것이라 했다. 고통의 순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이 들면 생기는 각종 질병이나 통증을 앓는 분들께는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누구라도 아파본 경험이 있어 알겠지만 병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가장 빠른 효과를 낼 수 있다. 빈곤은 또 다른 고통을 낳기 때문에 이 또한 무서운 고통이다. 의식주 어느 것 하나 안정적이지 못하니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도 없다. 외로움은 삶의 의지를 잃게 만드는 주범이다. 자의든 타의든 고립되고 단절되면서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일은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보루이다. 잉여인간이 아니라 작은 돈이라도 내 힘으로 벌 수 있다는 그 자부심이 자신을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을 헤아려보니 폐지 줍는 어르신들 모두가 네 가지의 고통 중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겪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을 보면서 ‘굳이 저렇게 해야 하나’라고 했던 나의 짧은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분께 드릴까 물색하지 말고 어느 분이라도 가져가실 수 있도록 도서관 앞에 잘 정돈해서 폐지를 내 놓아야겠다. 추울 때는 따뜻한 차 한잔, 더울 때는 시원한 물 한잔과 함께 애정 어린 안부인사도 건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