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길 잘했다. 남편의 회사 상사였던 분의 장례식이었다. 해외에 있어 조문을 갈 수 없는 남편이 대신 가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망자의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이니 당연히 다녀오겠다고 했다. 향연 72세. 삼십몇 년을 한 회사에서 일을 하다 오래전에 퇴직으로 회사를 떠나 얼굴 뵌 지는 꽤 오래되었다.
망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화학업계 회사 부사장으로 퇴직하다 보니 동종업계 중소기업에서 모셔가기에 바빴다. 퇴직하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주위에서 말하길 그분은 일없이는 못사시는 분이라고 했다. 남편도 일에서만은 그분을 존경한다고 할 정도로 일에 진심이라고 했다. 일에 진심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잠시 고민했다.
삼 년 전부터 췌장염을 앓으면서 꾸준히 추적검사를 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한 번은 운전하다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사고까지 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을 계속했다. 염이 암으로 진전되어 선고를 받고서야 그만두고 상경해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방사선 치료 후 암 수술을 받을 계획이었지만 수술도 해보지 못한 채 생의 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한 분을 예로 들자면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92세인 의사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요즘 의사 파업 때문에 의사가 부족한 원인으로 연세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하기 더욱 좋은 조건이었으리라.
모두가 입을 모아 망자에 대해 ‘일만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라며 애석해하면서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분은 그랬을 거라고 쉽게 인정해 버린다.
습관이나 관행을 깨고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것이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열심히 하고 워커홀릭이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 때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을 의미 있고 잘 사는 방법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 일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매몰되다 보면 그 밖의 것들에 관심을 두지 못할 뿐이다. 가마솥 안에 든 개구리가 서서히 높아져 가는 온도를 감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일에만 파묻히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책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경제활동에 끊임없이 강요 당하는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삶을 노동의 노예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다. 자율성과 자발성이 없는 일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게으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 용기를 내지 못할 경우에는 주위에서 손을 내밀어 꺼내 주어야 한다.
일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지 직접 눈으로 보았다. 비슷하게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잠시 충격에 휩싸일 뿐 곧 현실로 돌아가 또다시 일에 묻히는 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남편에게 위로와 함께 자각하며 살라는 의미에서 몇 마디를 건네었다.
‘회사가 지나친 요구를 해 올 때 ‘No’라고 말하라고, 지금까지 회사에 기여한 점으로 미루어 오히려 회사가 당신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어도 모자란다고, 회사가 당신을 가차 없이 해고할 수 있을 거라는 각오를 하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위로가 되었는지 남편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필요할 때 그러겠다고 답했다. 아직은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라 남편의 실직은 실제로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건넨 이유는 마음의 준비를 위한 선언 같은 것이었다. 언제든 일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자는 다짐 같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