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를 읽고
<노인과 바다>는 내가 아주 어릴 때, 그 가난한 시골집 책꽂이에도 꽂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 한 노인이 매일 낚시 줄을 드리운 채 고래(?)를 잡기 위해 앉아있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소리를 나는 귀동냥으로 들었다. 어릴 때의 그 유언비어는 나에게 변함없는 진실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확인하려는 시도를 이제야 했다는 것이 부끄럽다가도 지금쯤 읽었으니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가 이 작품을 쓰는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대중은 헤밍웨이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없이 반복한 퇴고 끝에 선보인 이 작품은 퓰리처상에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고 최고의 군더더기 없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헤밍웨이는 소설 속 노인에게 자신을 투영해 보였다 . "인간은 파멸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며 물고기 잡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노인의 모습이 곧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노인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도 절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손가락질해도 산티아고는 희망을 가지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결국 사투 끝에 집채만한 청새치를 낚았으나 곧 상어에게 습격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청새치 뼈다귀를 배에 달고 돌아왔다.
산티아고는 왜 그토록 물고기 잡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누구의 간섭과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 즉 그 신념을 자신에게 제일 먼저 증명해 주고 싶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가치와도 같은 것이었다.
신념이란 것이 청새치를 낚는 산티아고 노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 평범해서 신념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촌 어르신들께도 그들만의 신념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떨어진 콩 한쪽 깨 한 알까지도 귀하게 여기며 줍느라 무릎과 허리에 협착이 오고 걷지도 못할 만큼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오직 몸둥아리 하나로 자식 낳고 길러 이만큼 일궈왔다는 뿌듯함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한푼 두푼 모은 푼돈 농한기 때면 아파오는 만신을 주체할 수 없어 병원 가서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 한 번에 훅 날려도, 돌아오면 그 일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다.
여러 정형외과를 어머니와 투어 하듯 다닌 끝에 몇 달 전 수술을 하셨다. 가는 병원마다 시골 어르신들 만원이었다. 의사들은 어르신들께 일을 못하게 당부하는 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식들처럼 그들에게 강요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틈틈이 쉬어가며, 허리를 펴가며 하라는 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의 육체의 고통을 무시해가면서까지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의 습성을 나는 제대로 다 이해 못했다. 하지만 산티아고의 신념이 한 인간에게 얼마만큼의 큰 가치를 갖는지를 알고 나니 어머니의 그 고집스러움에 시선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얼마나 길게 갈지는 장담 할 수 없지만) 자식들의 잔소리나 강요가 왜 그토록 통하지 않았는지도 조금 알 것 같다.
타인의 신념이 내가 볼 때는 지나친 아집으로 보이기도 하고 타인 역시 내가 가진 신념을 이해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념이라는 것,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존재가치이므로 이해보다는 존중이 앞서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