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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Jul 06. 2023

두 번째 년 초

일 년 중 언제, 어디서건 사용가능한 쿠폰이 있었다. 이 쿠폰으로 온갖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고, 반면 갖은 부지런을 떨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모조리 시도할 수도 있다. 게으름을 피우고 나태해 지는데 쿠폰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건 주름과 후회뿐이다. 부지런하게 보내는데 지불하고 나면 꽤 많은 것이 남는다. 끄적거린 파일 더미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는 물론이고, 일일이 형언할 수는 없지만 자기성장 정도로 일축할 수 있다. 누구나 이것을 알차게 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공기처럼 무상으로 주어지고 차별 없이 맡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루쉰은 이것을 스펀지 속의 물에 비유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지만 짜고 또 짜도 나오는 스펀지 속 물과 닮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유효기간이 엄격하다. 한치의 양보도 없다. 그저 일정하지만 묵묵히 앞만 보고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다. 그래서 쏜 살 같이 지나간다라고 비유되기도 한다. 쿠폰은 다름 아닌 365개의 날들을 하나로 묶은 일 년이라는 시간이다. 벌써 반 이상의 쿠폰에 유효기간이 지나가버렸다. ‘반이나 남았네’와 ‘반밖에 안 남았네’ 둘 중에 압도적으로 후자에 힘이 실리면서 마음이 약간 조급해진다. 


꺾어진 일년의 달이 시작되었다. 세월을 탓하기엔 이미 세월의 속도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단지 실행력이 떨어지는 나를 꾸짖을 뿐이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면 중간이 어디매에 있다는 것도 안다. 시작은 알지만 끝을 모르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중간 지점에서 잠시 뒤를 한 번 돌아보기로 했다. 앞만 보고 가는 것에 비하면 또 이 얼마나 자기반성적인 행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간 점검을 위해서는 년 초 세웠던 계획을 알아야겠기에 일기장을 뒤졌다. 거기에는 다소 두루뭉술한 계획들이 적혀있었다.

영어를 더 잘 하게 되는 것.

브런치북을 3권 발간하는 것

백일장 3군데 응모하는 것

독서 52권 이상 완독하는 것

취직하는 것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굵직한 가지 아래 나찾글, 일기쓰기, 칼럼필사, 단어찜, 포스팅 등 글쓰기를 위한 작업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두었다. 


영어프리토킹 스터디 모임을 통해 좋은 멤버들을 만났다. 실력이 출중한 멤버들 사이에서 숨가쁘게 달려가는 중이다. 적절한 스트레스가 에너지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브런치 북을 위해 우선 주제가 다른 매거진 네 개를 만들었다. 각 10개 이상의 글이 모여지면 브런치 북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창고에 곡식 쌓듯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데, 일주일에 하나 써낼까말까하는 게으름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내글빛(내 글에서 빛이나요)이라는 온라인 글쓰기모임에서 리더와 멤버들의 무한한 응원을 받으며 매진 중이다. 

3개의 백일장 도전을 위해서는 이제 겨우 하나를 준비 중이다. 시작이 반 이랬으니 이거 마감 후에 나머지 두 개도 무리 없이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유일하게 독서에 관한 계획만이 성공 확정이다. 1월부터 지금까지 집계한 독서량이 50권을 넘었으니 목표량을 채우기까지는 문제가 없겠지만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양보다는 질적인 독서를 위해 재독을 시도하는 중이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을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해서 일을 구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할 때 더욱 활기차다. 일은 내게 경제적 보상, 성취감, 글의 소재, 성장의 기회 등 다양한 것들을 준다. 우연찮게 도서관 지킴이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이끌어 가는 일을 맡았다. 년 초에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글쓰기 모임에 멤버가 7명으로 늘었고, 계속해서 지역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많은 프로그램을 개설해 나갈 계획이다. 도서관이 주는 기본적인 에너지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과 호흡이 잘 맞다. 그 외 일기쓰기는 붙박이가 되었고, 칼럼필사와 단어찜은 쉬어가기도 하지만 끈은 놓지 않고 있다. SNS에 짤막한 글들을 포스팅하는 것에 자주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좀 더 과감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많이 쓰는 일이 더 나은 글을 위한 지름길임을 믿고 막 쓰기로 하자.


뒤돌아서서 낱낱이 들여다보고 나니,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중간 쉼표는  정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두 번째 년 초를 맞이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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