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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Jun 17. 2023

무늬를 새긴다는 것

에피소드1. 


친구 H는 유방암을 앓고 있다. 서울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재발해서 몇 년째 진료를 다니는 중이다.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은 H가 진료 올 때면 같이 밥을 먹고, 때론 호캉스를 준비하고, 미술 관람을 하기도 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많은 친구들의 환영을 받는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잘 이루어지는 것도 H의 공로가 컸다. 오래 전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H는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다. 지금은 의지해도 될 만큼 컸지만 혼자 힘겨운 나날을 보내왔다. H와 그의 아들은 유머가 넘친다. 둘의 대화는 만담을 보는 듯하다. 하루는 H가 아들과 문자를 하던 중 갑자기 보이스 피싱이 의심되었다고 했다. “니가 내 아들인지 내가 우찌 믿노?” 했더니 아들이 즉시 증명해 보인 말은 “가시나들이 미쳤다 미쳤어”였다. 친구들이 H를 위해 뭔가를 계획할 때마다 좋아 읊조리던 말을 아들은 기억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하던 모습을 똑똑히 본 것이다. “이래도 내가 엄마 아들이 맞나 안 맞나?”


에피소드2. 


우리아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힘든 학업과정과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친구들과 더욱 끈끈한 정을 나누는 듯 보였다. 경도(경찰과 도둑)놀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대학생치고는 유치한 놀이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의 한결같은 첫 마디 “오~아들~”하고 받는데 갑자기 왁자지껄한 탄성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부모님께 전화를 했을 때 부모님이 하는 첫마디를 알아맞히는 것이 게임의 미션이었다. 남편은 언제나 그랬다. 아들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면 평소답지 않게 한껏 부풀린 목소리로 화답한다. 그날 아들만이 미션에 성공했다고 했다. 


에피소드3. 


어버이 날이었다. 아침부터 기다렸다. 편지한 통, 카네이션 한 송이라도 없지 않을 때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딸은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개인 자금을 융통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저녁 늦게 돌아온 딸은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직행한다. 가방이 불룩한가, 아니면 후드티 안으로 꽃을 숨긴 건가 곁눈질로 재면서 훔쳐보았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오더니 편지 한 통을 내게 건넨다. 나는 곧 따라올 다른 뭔가를 기다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게 다야?” 순간 딸은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너무 생경해서 당황하는 듯 했다.

“선물은? 꽃 한 송이도 없어?” 공연 연습 때문에 시간이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가게들이 문을 닫아버렸다며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스무 살이면 다 컸고 이건 감사에 보답하는 성의 문제라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여전히 엄마를 낯설게 여기며 딸이 또 덧붙였다. “엄마 이런 사람이었어? 난 엄마한테 편지 한 통이 더 가치 있는 선물이라고 배웠어.” 


사실 낮에 미장원에 갔었다. 원장님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감사 표시로 말로만이 아닌 선물이나 집안 일 거들기 쿠폰을 요구해 왔다고 했다. 마음만을 강조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내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부터라도 교육하지 않으면 자신밖에 알지 못할 것이라며 원장님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은 건 따라 해야 한다. 나도 확실하게 이 노선으로 갈아타야지라며 돌아온 거였다. 


위 세 가지 일을 듣고 겪으면서 나는 사람마다 갖는 무늬에 대한 생각을 했다.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을 색깔로 본다면, 무늬는 살아가면서 새겨 넣는 자기완성 같은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의 무늬를 안다는 것은 소통이 원활함을 의미한다. 더욱 끈끈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딸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본 모습을 알게 된다. 빨갱이었던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마주한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것냐”는 아버지의 입버릇 같은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제서야 아버지에게 그려진 형형색색의 무늬를 알게 되었다. 


H의 아들은 ‘가시나들이 미쳤다 미쳤어’라는 애정 어린 말을 떠올리며 엄마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아들은 ‘오~아들~’하는 아빠의 전화상 첫 마디로 세상 가장 든든한 외침을 새길 것이다. 딸은 양손 가득 편지와 선물을 들고 속물 같지만 솔직한 귀여움을 지닌 엄마를 떠올리면서 미소 지을 것이다. 


무늬를 그려 넣는다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무늬를 알아 봐주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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