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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Aug 17. 2023

잠 못 이루는 밤

< 여행기 5 >

다시 시애틀로 돌아왔다. 여행의 시작점에서 마침표까지 찍고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출발하여 숙소에는 늦은 밤에야 도착했다. 다음 날 만연설로 뒤덮힌 산을 트래킹하기로 해서 산 턱밑까지 들어가 짐을 풀었다. 산 아래 듬성듬성 자리한 숙소는 동화 속 숲속 집을 세트장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레이니어 산은 해발 4천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다. 시애틀의 어느 곳에서든 얼음왕국 같은 산봉우리가 보일 정도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에도 녹지 않고 하늘 가운데 걸려있는 만연설산이 신비로웠다. 산 아래 넓은 호수와 우거진 편백나무 숲을 한 참 달려야 겨우 국립공원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년 중 대부분은 입산 통제되고 여름 한 철 개방되다보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완만한 트레킹코스를 선택했지만 돌들이 많아 걷기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고도에 따라 달리 자생하는 나무와 풀들로 볼거리가 풍성했다. 고산지대의 풀꽃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람쥐와 마멋들이 경계를 허물고 다가온다. 맡겨둔 보따리 어서 내놓으라는 심산으로 등산객 가방을 탐문하려 든다. 야생동물의 습성일랑 엿 바꿔 먹었나보다. 덕분에 가까이서 귀여운 녀석들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더 이상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산 중턱까지 올랐다. 빙하가 쓸려 내려가면서 만든 깊은 골짜기로 작은 폭포만이 생동감 넘쳤다. 본격적 얼음산이 시작되는 곳이 지척이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거기까지였다. 구름이 얼음산을 쉬이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밤은 시내 한복판이었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시애틀을 잠 못 이루는 도시로 표현한 이유가 궁금해 영화를 다시 봤다. 과히 로맨스의 고전이라 할 만한 영화였다. 동부 끝 뉴욕과 서부 끝인 시애틀에 사는 두 남녀의 운명적 사랑을 다룬 영화였다. 시애틀이 간택된 이유는 지리적 여건이 만들어 내는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단순한 장치였을 뿐이었다. 

영화의 제목만으로 시애틀은 낭만의 도시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해가 지면 무서운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차량털이 범죄가 다반사라 차 안에는 아무것도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 불문율이다. 마약에 취한 것 같은 홈리스들에게 동정심 대신 경계심이 먼저 든다. 도시가 삭막하고 우울해 보였다. 


지금의 시애틀하면 어김없이 붙는 타이틀이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위치하고 스타벅스1호점이 탄생한 도시라는 명예이다. 

거물급 회사들이 미국 대륙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놀라웠다. 빌 게이츠가 낙후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회사를 설립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내게 울림을 주었다. 수도권에 모든 인프라와 인구가 몰려있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넓은 땅덩어리임에도 특화된 산업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점만은 부러웠다.


스타벅스의 시작은 사업가들을 위한 고급전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차별화된 서비스와 비싼 커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프라이드를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작은 가게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샵이 럭셔리하고 규모도 클 것으로 예상했지만 좁고 소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미국의 한 커피 브랜드가 우리나라 커피업계를 잠식해버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커피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지만 동네 커피샵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무한반복 하는 걸 가까이서 보다보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묶였던 가족여행은 끝이 났다. 남편을 혼자 남겨두고 비행기에 오르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주책바가지로 흘렀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전날 밤 남편과의 말다툼이 애틋함을 더욱 부채질했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로 한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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