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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Jan 17. 2021

웃지 않는 인사

어른이 되고 달라진 점

"너는 언제로 되돌아 가고 싶어?"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사실 그런 과거와 후회가 연상되는 질문을 좋아하진 않고,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상상한 적도 드물다. 굳이 꼽자면 생생한 기억이 남아있는 초등학교 때가 그립다. 동시에 그런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은 내가 미성숙해 보여서 썩 내키진 않는다.


되돌아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매일매일 눈물 나게 웃었던 기억이 생생해서다. 지금은 그때보다 웃음의 총량이 1/100으로 줄어든 것 같다. 그런데 어릴 적 너무 잦은 웃음 때문인지 지금도 작은 일에 쉽게 미소 짓는 편이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잘 웃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만 보면 엄청나게 줄어든 웃음인데 말이다. 어릴 땐 친구들과 다 같이 웃어서 내가 많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만 다른 친구들보다 오랫동안 웃긴 했다.


성인이 되어서 '잘 웃는다'는 평가를 들을 때면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안 웃는 것인지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이 정도 웃음도 나에게 매우 부족하고, 뭔가 잘못 사는 기분마저 든다. 그렇다고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처럼 억지로라도 웃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싶지 않다. 다들 마찬가지 일거다. 웃을 일이 있을 때에야 웃어야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릴 때에 무슨 대단한 행복이라서 웃은 게 아니라 작은 일에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지금 작은 일에 웃지 않을까? 큰 성과, 더 큰 만족, 더 큰 행복.. 얼마나 더 커야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서 웃을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것은 아닐지.


웃음이 멋쩍게 느껴졌을 때에는 스무 살 때부터다. 학교와 가족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그 혼돈의 카오스였던 시기.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잘 웃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다만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웃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자주 했었다.


특히 인사할 때 말이다. 웃지 않은 인사가 많아서 참 희한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느껴졌다. '인사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가'라고 속으로 욕한 적도 많다. 피하고 싶은 상대가 아닌 이상 인사라는 행위가 '만나서 반가움'의 의미가 내포된 일인데 어떻게 무표정으로 맞이하는지 늘 웃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그런데 상대와 친해지고 나서는 나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냥 인사를 무표정으로 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익숙해져야겠다. (어릴 때 무표정으로 인사하는 친구들이 있었겠지만 이 정도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무표정 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진 못했다.)


웃음은 강요할 수 없다. '인사 좀 밝게 해 주세요!'라는 부탁이 폭력적인 것 같기도 해서 누구에게 말 한적은 없다. 안 하던 사람이 그렇게 인사하면 더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한동안 초점이 나로 바뀌기도 했다. '내 웃음이 너무 헤플까?'. 인사할 때 내 모습을 관찰해봤는데, 상대가 멀리 보일 때부터 이미 웃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 회사에서 웃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나를 만났다. 무표정으로 인사하던 그 희한한 어른이 된 것이다. 웃지 않는 인사를 도대체 언제부터 하고 있었을까. 어른이 되기 싫다.



네가 오후 네 시에 나를 찾아온다고 하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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