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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Feb 08. 2021

인수인계서에 적힌 '화분에 물 주기'

직장인 에세이

이직 2년 차지만 아직도 첫 출근이 생생하다. 잔뜩 긴장하고 문을 열었는데 식물들이 많아서 초록빛이 여기저기 빛났다. 꼭 나를 싱그럽게 반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매일매일 이 식물들을 보면 그나마 삭막한 사무실에서 상쾌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 내 몸보다 가로로 큰 나무들이고, 무릎 정도 오는 화분도 5개 정도 있다. 무릎 화분에는 덩굴식물이 자라고 있어서 키가 나의 두배는 훌쩍 넘었고 바닥과 벽을 기대어 꽤 단단한 뿌리를 내며 벽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이런저런 화분이 총 스무 개였다.


인수인계서를 확인하고 이 화분에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는 일은 내 담당이라는 걸 확인했다. (나중에 이 인수인계로 말이 많았다 이하 생략) '얘네들 죽으면 아울 씨 탓이야'라고 말하는 직장상사를 보며.. 그분을 탓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약한 식물들을 째려봤다. 초록색이 곱게 보이지가 않는다. 화분이 사무실에 이렇게 많을 필요가 있을까? 슬슬 시들게 만들어볼까? 화분의 출처를 파헤쳐서 주인이었으면 가져가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이 회사 사람이 아니었다. 책임 전가를 실패하고 어쩔 수가 없어서 화분에 물 주면 움직이니까 몸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저기 물을 주는 일도 10분 안에 끝나기도 하고.

 

그럼에도 뜨거운 여름이면 일주일에 두 번은 줘야 했고, 귀찮아서 며칠 건너뛰면 바로 푹 늘어져 시들시들해지는 애가 있다.  왜 물 안주냐고 시위하고 난리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 모습이 보이면 단박에 잔소리를 듣게 된다. '왜 얘는 시들해졌나 물을 안 줬냐?' 나도 죽일 마음은 없어서 툴툴거리며 물통에 물을 담는다. '내가 깜박하면 너가 한번쯤 주면 되잖아..'

너무 커서 옮겨 심었는데도 전과 비슷하게 자라서 일단 묶음

이 비슷하게 생긴 식물들도 어떤 건 사랑스럽고 어떤 건 긍정적인 구석 하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랬더니만 좋아해 주지 않던 식물이 몇 달 내로 죽었다.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햇빛을 잔뜩 받고 물도 늘 똑같이 줬는데 말이다. 물만 준다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미안했다. 같은 시기에 사랑을 준 식물은 너무 많이 자라서 뿌리를 나눠서 빈 화분에 옮겨 심었다. 


어떤 건 두배로 자라나면서 어떤 건 죽어나갔다. 물론 해충이나.. 너무 많은 햇빛 등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게 내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죽은 화분 하나와 지금 죽어가는 화분 두 개가 모두 내가 안좋아하는(싫어하는건 아님) 동료 뒷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산소를 머금은 뿌리

좋아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데 미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염이 잘된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지낼 때에 나에게 외모 평가하던 젊은 집사님이 있었다. 그분의 딸을 볼 때마다 그분이 떠올라서 진심으로 사랑해주진 못했다. 반면에 내가 좋아하던 부부의 딸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한 이후에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아이만 생각하고 싶은데 부모가 같이 떠올라서 힘들었다.  


순수한 아이처럼 식물이 무슨 잘못이겠나. 그 동료 뒷자리 화분을 내다 버릴 때 비슷한 죄책감이 들었다. 옆 사무실에서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화분을 분리수거함 쪽에 버린 것을 발견했다. 잎이 말라서 꼭 탄 것 같았고 줄기도 힘이 없어서 흔들흔들거렸다.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화분을 데리고 왔다. 살릴 수 있을까? 내 자리 바로 뒤에 놓고 말도 많이 걸었다. 세 달이 지난 지금 그 식물은 10개의 잎을 새로 만들어냈고 물을 아주 잘 먹으며 쑥쑥 크고 있다. 또 최근에 덩굴 식물이 너무 많이 자라서 잘라내야 했는데, 그 줄기를 물에서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직 새 잎을 내고 자라는 단계는 아닌데 푸릇푸릇하게 살아있는 모습이 기특하다. 왠지 내 죄를 사함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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