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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Aug 10. 2016

<부산행>이 은유하는 것들

세월호 사건은 내가 아이가 생긴 후 겪은 첫 참사였다. 세월호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고 그래서 한 동안 뉴스를 마주하지 못 했다. 내가 사는 곳이 이런 곳이었구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되뇌며 내 아이가 마주하게 될 세상에 몸서리쳤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런 거였는데 뒤늦게 깨달은 걸까? 아니라면 왜 이렇게 된 걸까?


처음에는 무능한 지도자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라 길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는 ‘현장에서 구조할 능력이 있었던, 한때 유능했던 실무진들이 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침몰을 지켜보았는가’가 더 궁금해졌다. 그들은 언제부터 또 어떻게 괴물이 되었을까?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구성원 각자가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공공 문제에 참여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누구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러기에 민주사회에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것을 바탕으로 소신껏 판단하고 행동한 후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 시민의 자세라 배웠다. 반면 권위주의는 전체의 단합을 강조하는데 그 단합의 원칙, 방향을 정하는 것은 구성원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판단이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을 따르라’고 항상 그렇게 말한다. 나머지는 무지하고 감정적이기에 좋은 의사 결정을 하지 못 한다는 논리가 따른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대중은 개돼지에 다름없다. 그래서 세월호 내에서 전달되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시민들이 자기 자리에서 마주하던 현실을 환기시키며 각자의 감정선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권위주의 체제가 제 권위를 강화하는 핵심은 가혹한 처벌이다. 누군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혼쭐이 나야한다. 집단의 논리에 회의를 품고 제 생각을 말하면 우선 집단에서 배제된다. 때로는 잘려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히기 마련이며 그러면 대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들이 고통을 받는 지점은 불의한 자들을 향한 멈추지 않는 분노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매우 ‘자연스러운’ 무관심에서도 온다. 시간은 덫 없이 흐르고 그는 사회적으로 잊혀진, 죽은 사람이 된다. 특히 경제적 빈곤을 동반하기 때문에 상황은 더 끔찍하다.

가혹한 처벌이 주변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면 사람들은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데 부담을 느낀다. 일상에서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고 대의를 분명히 세울 일이란 사실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대부분의 곤란한 일들이란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것들이기 쉽고 그 폐해가 가시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운 일들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순간 생각하게 된다. 꼭 그렇게 다른 목소리를 내야만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씩 시키는 일만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라 마라 언급하지 않은 일에는 아예 고민을 끊는다.


점점 상층부의 지시는 느리고 모호하며 무책임해지기 시작한다. 제 논리를 다듬기보다 의전과 의례를 다듬는다. 어차피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요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밑에서 책임을 지기 싫은 사람들은 프로세스에 규정된 명백한 행동 문구를 찾기 시작하고 없으면 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할 일임에도 그것이 명확한 지시로 내려오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권위가 지시하는 것을 하고 지시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을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모두가 이 순간 내가 진짜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확실히 시키는 일만 따른 결과 벌어진 참극이라 나는 생각한다. 고위 관계자는 VIP에게 현장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에게 그것은 가장 확실히 지시받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열심히 일할수록 세월호는 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이 사회는 그렇게 생각 없고 영혼 없는 사람들로 더 많이 채워지고 있다. 리더가 뛰어나도 생동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권위주의 체제의 한계다. 지도자가 그렇지도 못 하다면 사회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어진다.  

신자유주의는 민주 정부 시절부터 확산되었지만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계급화되는 단계로 들어선다. 각자도생 하는 삶은 한편으로는 내가 잘하면 우월적 지위에 설 수 있다는 환상이라도 주었다. 하지만 어느덧 세상은 무엇을 해도 큰 변화는 불가능한 고착화된 사회가 되었고 거기서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저 자기 자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세상을 이런 꼴로 만든 누군가에게 돌을 던져야 하겠지만 나 역시 체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남 손가락질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그 지경이 되면 도덕이나 각종 미덕들은 폐기 처분되며 각자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저열한 싸움이 당연시된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부산행>은 정부나 지도자들의 무능이나 불합리한 지시가 재난을 가속화한다는 것을 곳곳에서 알리고 있지만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악한 기득권 대 선한 다수의 약자로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만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지옥을 함께 만들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이 영화는 <베테랑>처럼 불합리한 체제를 만든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일시적’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는다. 반대로 불만이 있어도 그 체제에 포획되어 체제가 요구하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모양새다. 이 관점이 <부산행>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한다. 손쉽게 대립각을 세우기보다 좀비 영화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안에서 관객들 각자 마음속의 병든 부분을 찾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세상의 변화는 지도자의 교체부터가 아니라 내가 각성하고 내가 체제에 타협하지 않는 순간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한다.

 열차의 문은 피아를 구별하는데 최적화된 설정이다. 예를 들어 석우(공유)와 노숙자(최귀화)가 열차 좌석 양쪽에 숨어 안전한 쪽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노숙자가 앞길을 막아 석우가 위험에 처하진 않을까 불안하다. 마음 한 구석에선 그래도 노숙자가 물려 나가떨어지더라도 석우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들은 나름의 선을 매번 긋는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 스스로가 어떤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인지를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확인시켜준다. 숨 가쁘게 생사여탈을 마음속에서 가르다 보면 얼마나 일상에서 그런 일에 익숙했던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하다 보면 공멸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기겁한다.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구나... 혹자는 쫓아오는 좀비들과의 사투가 지나치게 반복된다고 하지만 이걸 마치 심리 테스트라 한다면 납득이 간다. 실제로 영화를 볼 때 몰입감이 떨어지지 않는 건 좀비들의 호연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계산을 달리하려는 관객의 ‘진지한’ 고민 덕분이다.

<부산행> 속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모두 이 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을 은유하고 있다. 야구부 소년 영국(최우식)은 순수하기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죽음을 피하지 못 한다. 서로 부둥켜안고 최후를 맞이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 용석(김의성)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위기가 개인의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역설한다. 단지 무서웠을 뿐이고 꼭 살고 싶었을 뿐이다. 석우(공유)는 선과 악의 순환 고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큰 위기를 부르고 다시 가족을 위해 사투를 벌이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 사라진다. 혹자는 막판의 신파가 이 영화의 결점이라 말하지만 나는 열심히 살았음에도 절망을 마주하게 되는 애환이 느껴져 슬펐다.

우리 사회의 비극을 개인화하는데 반대한다. 이런 세기말 같은 분위기를 만든 건 권위주의 신봉자들 때문이다. 하지만 선악은 저기 높으신 분과 나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 안에도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을 것 같은 좀비라는 공포심에 쫓길수록 나는 체제의 노예가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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